[대법원 판결성향지수 첫 분석]최근 10년 정권-대법 상관관계
2014년 1월 차한성 당시 대법관의 후임인 조희대 대법관 후보자의 국회 인사청문회 때 나온 질의다. 대법원 보수성향 획일화를 비판한 내용이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50대 남성인 권순일(2014년 9월 임명), 박상옥(2015년 5월), 이기택(2015년 9월) 대법관 후보자의 청문회 때도 이 같은 질문은 도돌이표처럼 반복됐다.
그러나 본보 분석 결과 양승태 대법원장이 임명을 제청한 10명의 대법관 중 박근혜 정부 들어 임명된 조희대 권순일 박상옥 이기택 대법관 등 4명의 판결성향지수만 놓고 보면 중도에 가깝거나 오히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 양승태의 신진 대법관, 진보적 ‘스윙보터’로
출신 학교와 나이 탓에 대법원 구성의 다양성을 저해한다는 비판을 받았던 조희대 권순일 박상옥 이기택 대법관 등 4명의 판결 성향은 실제로는 이런 통념과 큰 차이를 보였다.
전임자와 단순 비교해도 권 대법관은 전임인 양창수 전 대법관보다 무려 15단계나 진보 쪽에 위치해 있었다. 실제 권 대법관은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에게 노조를 허용하고, 형사사건의 성공보수를 무효화하는 데 앞장섰다. 박 대법관도 전임 신영철 전 대법관보다 8단계, 이 대법관도 전임 민일영 전 대법관보다 6단계 진보 쪽에 있었다. 조 대법관은 차한성 전 대법관보다 한 단계 더 보수 쪽이었다. 이 4명은 사안에 따라 의견을 같이하면서 전체적으로는 보수화된 대법원의 스윙보터(swing voter)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조 대법관은 올 2월 일반전초(GOP)에서 총기를 난사해 병사 5명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이 확정된 ‘임 병장 사건’에서 이 대법관과 함께 “(국가의) 병영관리 소홀 탓도 있는데 범행 책임을 피고인에게만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며 사형에 반대했다. 같은 날 선고된 ‘보이스피싱 조직의 대포통장 인출 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전원합의체 판결에서도 이 4명의 대법관은 나란히 처벌할 수 있다며 소수 의견을 냈다. 다수 의견은 인출을 위해 통장 명의인의 정보를 입력하는 행위는 처벌조항이 규정한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엄격하게 해석한 반면 조 대법관 등은 법 해석을 유연하게 했다.
○ 대통령 바뀔 때마다 대법원 다양성 확대
이 전 대법원장 재임 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진보 쪽으로 스펙트럼이 좁게 모였다가 이명박 대통령 때는 보수-진보 양쪽으로 넓어졌다. 이명박 정부에서 양 대법원장으로 교체된 뒤 노무현 대통령 때 임명된 김영란 전수안 박시환 이홍훈 김지형 대법관 등 ‘진보 그룹’이 물러나면서 스펙트럼이 보수 쪽으로 좁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다 다시 박근혜 대통령 들어 2, 3년 차 신진 대법관들이 중도 경향을 띠면서 보수 영역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졌다.
이에 대해 의사결정 구조상 비슷한 성향의 대법원장-대통령 조합에서 ‘이심전심 효과’가 나타나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대통령 본인이 임명한 대법원장과 임기가 겹칠 때는 대법관의 판결 성향 스펙트럼이 임명권자 성향 쪽으로 좁혀지고, 다른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원장과 있을 때는 스펙트럼이 상대적으로 넓어지는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한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원장이 자기를 임명하지 않은 대통령과 일할 때 다양한 판결이 나온다는 의미로, 행정부와 사법부의 권력분립 또는 인사독립이 대법원의 다양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 진보성향의 보수 판결, 보수성향의 진보 판결
법원 안팎에서 ‘강경 보수파’로 분류되다가 지난해 퇴임한 신영철 민일영 대법관도 양 대법원장 취임 후 판결 성향이 중도로 선회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 전 대법관은 대법관 임명 전 촛불재판 개입 논란에서, 민 전 대법관은 재임 시절 ‘안기부 X파일’ 사건, ‘제주해군기지 승인 취소’ 사건의 주심을 맡아 보수적인 판결을 이끌었다는 이유 등으로 전형적인 보수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신 전 대법관과 민 전 대법관은 각각 보수 쪽에서 11, 12위로 열손가락 안에도 들지 못했다. 대법원장 교체기에 재임하던 대법관 11명 중 9명이 ‘우클릭’했지만 두 사람만 중도 쪽에 서는 모습을 보였다.
전원합의체 사건을 형사, 민사, 특별(행정 및 특허) 사건 3가지로 나눠 분석한 결과 대표적 진보 그룹으로 분류된 김영란 전수안 박시환 이홍훈 김지형 전 대법관은 형사사건에서 진보성향(1, 2, 3, 5, 6위)이 뚜렷했지만 민사에서는 이합 집산했고, 행정사건에서는 오히려 보수적인 색채(1, 2, 3, 4, 8위)를 보였다. 5명이 함께 참여했던 판결 65건 중 24건에서 의견이 갈렸는데 노동, 여성, 경제 질서, 인권 등 분야에서 각자의 법 해석이 달랐다.
신동진 shine@donga.com·권오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