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판결성향지수 첫 분석] 美 신상 비공개… 사법정책-법리 청문회 韓 “출신학교-성별 편향” 공방 벌이다 끝
미국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연방대법원을 이끈 얼 워런 전 대법원장(1953∼1969년 재임)은 공화당 출신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지명했다. 그는 대법원장에 오른 뒤 지명권자의 의도와 달리 흑백 분리교육을 철폐하고, ‘미란다 원칙’으로 잘 알려진 피의자 권리보호 제도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오죽하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퇴임 후 “워런을 지명한 것은 인생 최악의 멍청한 실수”라고 했을 정도다.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1981∼2006년 재임)도 공화당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임명했다. 하지만 그는 고비마다 ‘중도 대법관(median justice)’으로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다.
이처럼 미국 연방대법관은 정치적으로 임명되지만 소신에 따라 판결하는 사례가 많다. 안경환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미국 연방대법관은 임명 당시에는 대체로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과 정치·사법철학을 공유한다. 그러나 일단 자리에 앉으면 대통령보다는 동료들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 대법관의 첫 판결 성향 분석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관 다양화의 초점을 ‘출신’이 아니라 ‘개별 식견’으로 옮겨야 할 때”라고 말했다. 한국은 대법관 후보의 출신 고교와 대학, 성별만으로 대법원의 다양화를 주장하는 의견이 강하지만 미국에선 여성, 소수인종 등 배경만으로 판결 성향을 따지지 않는다.
미국 연방대법관 청문회는 1993년부터 후보자의 개인 신상 검증을 비공개로 하고, 공개청문회에선 사법정책이나 법리에 대한 질의응답에 집중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1991년 사상 두 번째 흑인 연방대법관으로 지명된 클래런스 토머스의 청문회 때 연방판사 시절 보좌관 성희롱 의혹이 폭로되면서 사생활 비밀은 보호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미국은 2000년대 초반부터 개별 연방대법관의 판결 내용에 초점을 맞춰 대법원 전체의 성향 추이를 과학적으로 분석했지만 한국에선 대법관 판결 성향에 대한 계량적인 검증이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권오혁 기자 hy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