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1> 광주 신창동 유적 발굴한 조현종 前 광주박물관장
27일 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이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목제 괭이자루를 살펴보고 있다. 이곳에서는 기원전 1세기 원삼국시대 유물 2000여 점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광주=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 국도 방향을 바꾼 역사적 발굴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1997년 출토된 수레바퀴 유물들(위 사진). 바퀴축과 바퀴살, 가로걸이대가 보인다. 아래 사진은 베틀 유물로, 방추차와 바디 등 부속품들이 한꺼번에 출토됐다. 국립광주박물관 제공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현악기 등 각종 농경의례 유물들.
그해 6월 공사는 전면 중단됐다. 국도 1호선은 유적을 피해 우회도로가 만들어졌다. 공사 중 발견된 유적으로 인해 국도 방향이 바뀐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문화재위원이던 김원룡 서울대 교수와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장, 김기웅 경희대 교수가 진가를 알아보고 당국에 유적 보호를 강력히 요청한 결과였다. 김원룡은 한발 더 나아갔다. 당시 지건길 국립광주박물관장에게 “발굴을 즉각 중단하고 먼저 저습지 발굴기술부터 배워 오라”고 했다. 그때 한국 고고학계는 저습지 발굴 경험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조현종의 회고.
괭이, 따비 등 나무로 만든 각종 농사 도구들.
“발굴 중이던 유적을 중간에 덮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하지만 흠 없이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곧 수긍했습니다. 유적을 위해서도 저 개인을 위해서도 훌륭한 판단이었죠.” 조현종은 그해 12월 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로 떠나 저습지 발굴을 배운 뒤 1995년 5월 신창동 유적 발굴을 재개했다.
신창동 유적에서 발견된 나무로 만든 문짝. 고상가옥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 삼한 최고(最古)의 수레를 발견하다
1990년대 당시 신창동 발굴 현장. 부식되기 쉬운 목기와 칠기 등이 다수 출토됐다.
2000년 말 구라쿠 요시유키(工樂善通) 사야마이케(狹山池) 박물관장을 만난 조현종은 그가 그린 스케치 한 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해 중국 쓰촨(四川) 성에서 출토된 수레바퀴 유물을 묘사한 그림은 3년 전 신창동에서 나온 목기(木器) 형태와 흡사했다. 발굴팀은 해당 유물에 대한 정밀조사에 들어갔다. 당초 의례용 기물로 알았던 유물은 바퀴살과 바퀴축, 고삐를 고정하는 가로걸이대(車衡·거형)로 각각 밝혀졌다. 앞서 평양 낙랑고분에서 기원전 2세기의 수레 유물이 발견됐을 뿐, 삼한지역에서 최초로 출토된 기원전 1세기 수레 유물이었다. 학계는 흥분했다.
1990년대 당시 신창동 발굴 현장. 부식되기 쉬운 목기와 칠기 등이 다수 출토됐다.
‘마한 사람들은 소나 말을 탈 줄 모른다(不知乘牛馬)’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 첨단의 수레 제조기술을 익힌 고조선 유이민(流離民) 집단이 삼한으로 이주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한반도 고대사 해석의 큰 흐름을 바꿀 수 있는 대발견이었다.
1990년대 당시 신창동 발굴 현장. 부식되기 쉬운 목기와 칠기 등이 다수 출토됐다.
저습지 특유의 지난한 발굴 작업 끝에 나온 값진 결과물이었다. 땅속에서 수천 년 묵은 유기물이 밖으로 나왔을 때 급작스러운 부식을 막으려면 약품 처리와 습기 유지 등 꼼꼼한 준비가 필수. 워낙 조심스럽게 발굴이 진행되다 보니 신창동 유적에서는 가로 25m, 세로 25m 넓이의 유구를 3m 깊이까지 파는 데 3년이나 걸렸다. 저습지가 아닌 일반 발굴 현장에선 같은 면적의 작업에 통상 2개월 정도가 걸린다.
1990년대 당시 신창동 발굴 현장. 부식되기 쉬운 목기와 칠기 등이 다수 출토됐다.
최근 국립광주박물관장에서 정년퇴직한 그에게 남은 과제를 물었다. “신창동에서 야자수 열매를 꼭 닮은 나무 그릇이 나왔습니다. 나는 이게 삼한이 멀리 동남아시아와 교류한 흔적이라고 믿어요. 동북아시아에만 국한하지 않고 시야를 넓혀서 연구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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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