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끄저께 영축산 다비장에서
오랜 도반을 한 줌 재로 흩뿌리고
누군가 훌쩍거리는 그 울음도 날려 보냈다.
거기, 길가에 버려진 듯 누운 부도
돌에도 숨결이 있어 검버섯이 돋아났나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내려왔다.
어느 숲 눈먼 뻐꾸기 슬픔이라도 자아낼까
곰곰이 뒤돌아보니 내가 뿌린 재 한 줌뿐이네.
옛날, 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어머니를 떠나 산에 들어왔다. 하는 일은 절의 소를 돌보는 것이었다. 시간이 빠르게도 흘렀고, 느리게도 흘렀지만 소년은 산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소를 먹이던 소년은 ‘무산’이라는 법명의 스님이 되었다. 그리고 스님이 된 그는 언젠가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재 한 줌’은 바로 그 스님 시인의 작품이다.
조오현 시인은 산에 산다. 그곳의 돌이나 나무처럼, 부처와 산을 보며 오랜 세월을 지냈다. 그래서인지 시에서는 맑은 향내가 난다. 특히나 세상의 너무 많은 조언으로 마음이 버거울 때 그의 시를 읽으면 참 좋다. 내가 나를 혼내고 싶을 때, 대신 그의 시를 읽으면 더 좋다.
시에 의하면, 시인은 어제 장례식에 참석했다. 도반, 즉 함께 도를 닦던 사람을 잃었기 때문이다. 곁에서는 여러 사람이 울고 있었고 시인은 화장한 재를 뿌렸다. 이 1연이 ‘오늘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면, 2연은 ‘오래된 죽음’을 이야기한다. 2연에서 시인은 오래된 부도를 바라보고 있다. 부도는 스님의 유골을 보관하는 돌탑을 말한다. 오래된 부도에는 어떤 스님의 오래된 유골이 담겨 있을 것이다. 시인은 오늘의 죽음을 보고 내려오다가 또 다른 죽음마저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죽음, 나아가 삶 그 자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 생각 끝에 얻은 의미가 3연을 채우고 있다.
내가 죽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육신은 남아 줄 리 없다. 재산과 명예도 내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시인은 내가 뿌린 ‘재 한 줌’이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도반의 ‘재 한 줌’은 이미 허공에 흩어져 사라졌으니, 이 말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