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애 아빠’서 다큐사진 작가로… 신제섭씨 인생2막
《프로골퍼 신지애(28)는 최근 한국 여자프로골프에서 새로운 역사를 썼다. 일본여자프로골프(JLPGA)투어 니치레이 레이디스에서 3연패를 이루며 역대 한국 선수 통산 최다 우승 신기록인 45승 고지를 밟았다. 당시 뜻 깊은 순간을 맞아 신지애의 곁에는 아버지 신제섭 씨(57)가 있었다. 시상식이 열린 날은 마침 신 씨의 생일이자 일본에서 아버지의 날이었다. 부녀는 잊지 못할 추억을 쌓았다. 신 씨는 “지애가 아빠가 꼭 와줬으면 좋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 모처럼 일본에 갔는데 소중한 선물을 받았다”며 기뻐했다.
2000년대 10년 넘게 신지애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뒷바라지에 정성을 다했던 ‘골프 대디’ 신제섭 씨는 지난 몇 년간 딸에게서 ‘독립’했다. 한때 자신의 이름은 사라진 채 ‘지애 아빠’로만 불렸던 그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며 새로운 인생을 펼치고 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찾은 아빠의 청춘. 그 사연을 아버지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들어본다.》
프로골퍼 신지애를 세계적인 필드의 스타로 키운 아버지 신제섭 씨. 한국의 대표적인 골프대디였던 그는 신지애가 세계 랭킹 1위에 오른 것을 계기로 어릴 적 꿈이었던 사진작가로 제2의 인생을 걸어가고 있다. 카메라를 통해 보는 세상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는 신 씨가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다른 사람의 렌즈 앞에 섰다. 그의 표정이 자연스럽게만 보였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2010년 5월 지애가 한국 최초로 골프 세계 랭킹 1위에 올랐을 때 아빠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됐다. ‘지애에게 골프를 처음 시켰을 때 세웠던 목표는 다 이뤘다. 이젠 내가 딸에게서 손을 떼야 할 때가 됐구나.’ 그때부터 카메라를 잡게 됐단다. 우리 딸이 골프선수로 성공해줘서 아빠 역시 접었던 꿈을 다시 키울 수 있었던 거야. 고맙다.
신제섭 씨에게 사진이란 ‘잃어버린 순간’을 담아내려는 작업이다. 신 씨는 오지 원주민들의 삶을 통해 참된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려 한다고 말한다. 중국 구이린에서 가마우지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할아버지(왼쪽 위). 미얀마의 소수민족인 샨족(왼쪽 아래). 인도 푸시카르 지역의 낙타 매매시장에서 낙타를 못 팔아 낙심한 채 집으로 돌아가는 할아버지(오른쪽). 신제섭 씨 제공
지난해에도 잊지 못할 작업을 했단다. 미얀마 무라쿠에 친 빌리지라는 마을에 갔었지. 비행기, 차량, 보트를 바꿔 타면서 도착하는 데 꼬박 3박 4일 걸렸어. 그곳에는 예부터 미인이 많이 살았는데 원주민 여성들은 10세만 되면 얼굴에 온통 거미줄 모양의 문신을 하더라고. 외지인이 침입이라도 하면 흉측하게 보여 잡혀가지 않으려고 그랬다는구나. 마을에 그 문신을 한 할머니는 12명만이 생존하고 계셨는데 가장 어린 분이 60세였어. 다들 오래 사셨으면 좋겠어.
좋은 사진 역시 고단하고 힘겨운 과정 없이는 불가능하더구나. 다행히 성과가 있어 몇 차례 전시회를 개최해 보람을 느꼈다. 그동안 수원 화성 국제 사진제에 출품했고, 서울 코엑스에서 단독 전시회를 열기도 했지. 지애가 아빠 사진을 보러 왔을 때 어깨가 으쓱거리더구나. 태국에서의 개인전을 비롯한 네 차례 개인전도 반응이 괜찮았다. 대학원 마치고 나면 사진 강의를 하고, 고향 광주에 갤러리도 열려고 한다. 사진전을 하고 싶어도 비싼 전시 비용 때문에 엄두를 못내는 사진가가 많더구나.
지애가 골프와 처음 인연을 맺던 때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구나. 대학에서 제적당한 후 아빠는 신학교에 들어간 뒤 총신대 신학대학원을 마쳤다. 우리 집안이 3대에 걸친 기독교 가정인 영향도 있었다. 광주에서 목회 활동을 하던 아빠는 원래 스포츠광이었다. 광주일고 야구 응원단장도 하고 전남대 볼링 동아리도 만들었지. 그래서 지애가 태어나기 전부터 무조건 운동을 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지애에게 어떤 운동이 좋을까 고민하다 한국 여자 선수가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종목 가운데 하나인 양궁으로 정했단다. 지애가 광주에서 양궁으로 유명한 구암초등학교에서 활을 잡게 된 건 그런 이유에서였어. 그러다 전남 영광에서 작은 교회를 열게 되면서 우리 가족이 이사를 갔는데 집 옆 원자력발전소에 골프연습장이 있었단다. 전 재산이 1500만 원밖에 안 되는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주위의 지원을 받아가며 골프를 가르칠 수 있었단다. 당시 박세리 때문에 국내에서 골프 인기가 대단하지 않았니. 그때 너한테 중고 골프채 풀세트를 41만 원을 주고 사줬는데 7번 아이언도 없는 어설픈 클럽이었다. 그래도 너는 골프 입문 5개월 만에 처음 나간 대회에서 준우승을 하며 가능성을 보였어.
아빠는 지애가 천재형은 아니라고 본다. 타고난 재질보다도 엄청난 노력을 통해 세계 정상까지 올라설 수 있었던 거야. 주니어 시절 넌 하루에 공 1300개가 들어가는 커다란 박스를 다 비우고야 훈련을 마쳤지. 연습장 앞에 20층 아파트가 있었는데 워밍업으로 그 아파트 1층부터 꼭대기까지 계단 걷기만 일곱 번씩 하지 않았니. 광주 전남 지역 대회에서 40연승 넘게 뛰어난 성적을 냈지만 전국 대회에서는 우승과 별 인연이 없어 안타까웠는데 함평골프고에 입학한 후에 넌 국내 최강이 됐지.
그러기까지 참 아픈 일도 많았다. 지애가 중학교 3학년 때인 2003년 엄마를 교통사고로 저세상으로 보냈을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미어진다. 어린 나이에 큰 시련을 겪었는데도 지애는 참 의연했어. 엄마와 같이 차를 타고 있던 두 동생도 중상을 입어 1년 가까이 입원을 했는데 지애는 병간호에 엄마 노릇까지 해냈다. 조의금으로 들어온 1500만 원으로 계속 골프를 하게 될 때 아빠는 너에게 “엄마 생명과 바꾼 돈이니까 한 타 칠 때마다 신중하게 쳐라”라고 말했었지. 지애가 언젠가 인터뷰에서 “우리 집을 살리고 일으킬 수 있는 것은 골프밖에 없다고 생각해 연습에 더더욱 열중했다”고 말한 걸 보고 남몰래 눈물도 쏟았다. 필리핀 전지훈련을 갈 때는 아는 은행 지점장에게 웨지 3개를 맡기고 1000만 원을 대출받지 않았니.
시련 속에서 더욱 단단해진 지애가 승승장구하면서 아빠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했어. 고교 시절 프로대회 우승, 2006년부터 2008년까지 3년 연속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상금왕, 2009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3관왕…. 넌 참 대단했어. 하지만 아빠는 지애가 어린 나이 때부터 너무 힘들게 운동에만 매달렸기에 프로선수로 10년만 뛰고 은퇴했으면 했다. LPGA투어에서 고단하게 사는 네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때도 많았어. 결국 ‘꿈의 무대’라는 미국 투어를 포기하고 2014년 부터 JLPGA투어에서 뛰고 있는 건 참 잘한 결정이야. 사상 최초인 한미일 상금왕 석권을 노린다는 명분도 얻지 않았니. “아빠가 손을 놓고 내가 알아서 하니까 골프가 더 즐겁다”는 지애 얘기가 한편으로 서운했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올해 JLPGA투어에서 상금 선두 경쟁을 펼치고 있어 기대가 되기는 하지만 즐겁게 운동하게 된 것만으로도 아빠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너희들 덕분에 자식 잘 키우는 비결이 뭐냐고 묻는 사람도 많아졌다. 교육 관련 강의에 나서기도 했지. 왕도는 없는 게 아니겠니. 다만 아빠는 너희들에게 늘 두 가지를 강조했다. 첫째는 거짓말 하지 말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형제끼리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두 가지만 확실하게 지키게 하면서 아이들에게 최대한 자율성을 부여하고 그 대신 스스로 책임을 지게 했지. 자녀 교육에서는 칭찬도 중요하다고 본다. 골프대회 성적이 안 좋더라도 지애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고 했지. 가령 “이번 대회 코스는 너랑 맞지 않나 보다”라거나 “지쳐 보이는 데 한 번 쉬어갈 때도 됐다”는 식으로 위로해 주려 했어. 지애보다 골프에 대해서 전문가가 되려고 책도 보면서 공부도 많이 했는데…. 내가 잘 알아야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야.
지난달 19일 일본여자프로골프투어 니치레이 레이디스에서 3연패를 달성하며 개인 통산 45번째 트로피를 차지한 신지애(오른쪽)가 마침 이날 생일을 맞은 아버지 신제섭 씨와 기쁨을 나누고 있다. 신제섭 씨 제공
각자 떨어져 바쁘게 살다 보니 다 같이 모일 시간이 별로 없어 아쉽구나. 지애는 일본에, 둘째는 서울에 있고, 새엄마와 막내는 미국에 있으니 말이다. 다음 달에는 방학 기념으로 일본 홋카이도로 모처럼 가족여행을 갈까 한다. 지애가 미국 투어 다닐 때는 아빠가 운전하고, 밥 차려 주고 하면서 하루 24시간을 같이 보냈는데…. 14시간 동안 운전대를 잡은 적도 있었지. 그래도 힘든 줄도 몰랐어. 내 생애 가장 열정적으로 살았던 순간이야. 이제 렌즈 속 세상을 통해 그런 불꽃을 다시 태우고 싶구나. 우리 가족 모두 파이팅.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