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탐사기획/프리미엄 리포트/위작에 멍드는 미술계] 미술계 흔드는 유통시장 검은손 원로화가 항의해 리스트서 빼기도… 황학동-인사동서도 위작 쉽게 구입
“이 그림은 내 작품이 아니다. 경매를 당장 취소해 달라.”
최근 홍콩에서 열린 한 국내 대형 경매회사의 정기 경매를 앞두고 매물 목록을 검토하던 원로 화가 A 씨는 화들짝 놀라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1970년대 중반 완성했다는 작품의 이미지가 아무래도 미심쩍었던 것. 곧 실물을 확인한 그는 위작임을 확신하고 매물 리스트에서 빼 달라고 요청했다. A 씨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다른 시기에 몇 번 그린 곡선 추상을 비슷한 느낌으로 그럴듯하게 흉내 낸 그림이었다”며 “경매사가 즉각 내리지 않고 망설여 더 놀랐다. ‘이거 안 빼면 내 모든 작품을 문제 삼겠다’고 한 뒤에야 요구가 수용됐다”며 한숨을 쉬었다.
미술품 위작 유통은 희귀한 일이 아니다. 알려지는 경우가 극히 적을 뿐이다. 지난봄 서울에서 열린 한 메이저 경매에서 한국 근대미술 대표작가 B 씨의 그림이 수억 원에 낙찰됐다. 지난주 기자와 만난 한 감정 전문가는 “미국 대형 경매에 등록됐다가 유통 경로를 의심받아 철회된 그림이었다. 하지만 경매사의 자체 판정 외에는 제대로 된 감정 절차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위작 유통 현장은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은밀한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게 아니다. 취재팀은 최근 서울 황학동 풍물시장, 답십리 고미술상가, 인사동길 화랑거리 등에서 유명 작가의 작품 구매를 시도했다. 풍물시장에서 만난 한 상인은 높이 30cm 정도의 조각상을 보여주며 “이름난 작가 M 씨의 작품인데 150만 원에 가져가라. 지방 갤러리 가서 찾으면 2000만 원 넘게 달라고 할 것”이라고 ‘떡밥’을 던졌다. 근거 없이 이중섭 천경자 작품이라고 내놓은 그림도 심심찮게 보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40대 작가는 “끊임없는 위작 논란으로 미술계 전체가 ‘범죄 소굴’처럼 여겨지고 있다. 개선의 실마리를 쥔 사람들이 손놓고 있기 때문이다. 열쇠는 유통시장에 있다”고 말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