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탐사기획/프리미엄 리포트/위작에 멍드는 미술계]‘위작 진실공방’ 휩싸인 이우환 화백 작품
“가짜 감정서가 붙어 있든, 안료 성분이 어떻게 나왔든, 위조범이 자백을 했든 말든 그런 건 난 모르겠다.” 지난주 경찰 조사를 받은 이우환 작가는 위작 의혹 그림을 살펴본 뒤 “유통된 그림 중에서 내 눈으로 본 모든 그림은 진품”이라고 주장했다. 동아일보DB
오랜 위작 논란에 휩싸인 화가 이우환 씨(80)가 지난달 30일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왜 유독 이 씨의 그림이 첨예한 ‘위작 진실 공방’에 휘말린 걸까.
○ 이우환 작품에 위작 시비가 잦은 이유
이 씨 그림을 위조한 혐의로 체포된 화상(畵商) 현모 씨(66)는 경찰 조사에서 “부산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한 골동품상 이모 씨(68)가 2011년 ‘이우환 그림을 애호하는 일본의 모 그룹 회장에게 위작을 만들어 팔자’며 접근해 왔다”고 진술했다. 현 씨는 그림 위조 기술자인 다른 이모 씨(39)와 함께 경기 남양주시 작업실에서 위작 50여 점을 제작했다고 자백했다. 이들은 위작에 1978, 1979년 작품으로 가짜 서명과 일련번호를 넣고 가짜 감정서도 만들었다.
경찰에 꼬리가 밟힌 건 그림을 판 이익의 배분 다툼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 씨는 2013년 골동품상 이 씨와 그 아들에게 “수십억 원의 판매 대금을 독식하고 약속한 대가(절반)를 주지 않는다”는 항의 문서를 보냈다가 수사망에 포착됐다.
일본의 애인 집으로 도망갔다가 그곳까지 쫓아온 한국 경찰에게 붙잡힌 현 씨는 순순히 범행 사실을 인정했다. 경찰이 확보한 물증은 지난해 서울 A화랑과 동대문구 고미술상가 등의 압수수색에서 확보한 위작 의심 그림 수십 점이다. 현 씨는 경찰이 제시한 압수품 중 4점에 대해 “틀림없이 내가 위조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지난해 12월 K옥션 정기 경매에서 이우환 화백의 1978년작 ‘점으로부터 No. 780217’로 등록돼 4억9000만 원에 낙찰된 그림(위 사진). 재판을 받고 있는 위조범 현모 씨는 이 그림에 첨부된 감정서를 자신이 만들었다고 자백했다. 동아일보DB
2012년 위작 논란이 빈발하자 의심스러운 그림을 모아 작가와 감정단이 함께 검토해 감정서를 발급한 장소도 B화랑이었다. 2013년 초 감정단과 작가 의견이 대립해 합의를 보지 못한 뒤 이 모임은 사라졌다. “그림을 감정하는 전문가가 한국에는 너무 부족하다”고 불만을 토로한 이 씨는 ‘B화랑의 감정은 믿을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이우환 씨 그림 위작을 대량 유통시킨 혐의로 압수수색을 받은 A화랑은 2012년 한 개인 컬렉터에게 이 씨 작품이라며 그림 한 장을 4억 원에 판매했다. 이 그림에는 B화랑의 주선으로 발급된 친필 작가확인서가 붙어 있었다. 경찰이 ‘확실한 위작’으로 제시한 4점 중 하나가 이 그림이다. 그러나 이우환 씨는 그림을 확인한 뒤 “작가확인서는 내가 작성한 것이 맞고, 이 그림은 분명히 내가 그린 진품”이라고 말했다.
○ 미술계 위작은 ‘유통’이 만든다
만약 경찰이 위작이라 결론내린 그림에 대해 이우환 씨가 ‘내가 그린 것이 아니다’라고 동의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작가 이 씨는 친필 작가확인서를 발급한 그림의 진위 판정 오류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오랜 기간 쌓아온 명망과 신뢰도에 회복 불능의 치명상을 입게 된다. 이 씨는 기자회견 말미 “해외 거래에서 이미 꽤 큰 타격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한 미술평론가는 “이른바 ‘큰손’이라 불리는 개인 컬렉터들은 위작 거래를 경험하고도 못 본 척 묵인하는 경우가 적잖다”고 했다. 수억 원대 그림을 취미로 수집하면서 ‘일부의 오류’는 감수하는 편이 낫다는 얘기다. 이미 거래된 그림의 진위를 따져봤자 번거롭게 구설에 오르내릴 위험만 있을 뿐 딱히 득 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김배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