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오 전 국회의장
신동아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1992년 국회에 첫발을 들인 뒤 지역구에서 내리 5선(14∼18대)을 지냈다. 파란곡절의 한국 정치사를 헤쳐 온 사람답지 않게(?) 눈빛이 맑고 부드러운 선한 인상이다. 20쇄 넘게 찍은 ‘술탄과 황제’ 개정판 작업으로 바쁘다는 그는 “모든 직업이 다 그렇지만 정치도 결코 영원하지 않다. 은퇴 후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허문명 논설위원
이명박 정부 때인 18대 국회 전반기 개헌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종합보고서를 냈던 김형오 전 국회의장(69)은 평소 국회 개혁에 대해서도 관심이 깊다. 지금 우리 국회의 비능률과 무책임은 정치문화 탓인가, 헌법 탓인가. 헌법을 고친다면 어떤 내용을 넣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생각하며 그를 1일 만났다. 》
기본 윤리나 책임의식 없는 의원들
―너도나도 살기 힘들어 아우성인데 개헌이라니, 정치인들이 권력 나눠 먹기에만 골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국민은 국회에 분노하고 있다. 의원들이 원하는 내각제나 이원집정제는 결국 국회 권력을 키우자는 얘기 아닌가.
“개헌이라고 하면 권력구조의 문제, 속칭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까지 나오는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그런데 대통령 권한을 줄이면 상대적으로 국회 권한이 커지는데 이런 국회에 더 큰 권한을 준다고? 고양이에게 생선가게 맡긴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많을 것이다. 국회가 먼저 달라진 모습을 보여야 개헌론에도 힘이 실릴 텐데 새누리당에도 야당들에도 별로 기대가 되지 않는다.”
―제도 탓인가. 오래 누적된 정치문화 탓인가.
“둘 다라고 생각한다. 국회의원들이 기본적인 윤리나 책임의식이 없다. 제도적으로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힘이 실려 있고 국회는 상대적으로 너무 권한이 없다 보니 정치문화가 후진적일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다.”
―‘입법독재’란 말이 나올 정도로 국회 권한이 막강한데 무슨 말인가.
그는 “국민 혈세를 제대로 쓰는 게 제일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회는 매우 엉성하다. 솔직히 국회의장 시절 예산안 통과시킬 때도 내용을 다 알지 못했다”고 했다.
“미국은 예결위원회에 적어도 몇 선 이상 의원이 들어간다. 작은 비리라도 걸리면 즉각 퇴출되고 다시는 들어가지 못한다. 우리는 주로 초선들이 지역별로 안배해 들어간다. 미 의회를 방문했을 때 느낀 건데 예결위 위원들이 자기 지역구에 민원성 예산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비열한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일을 하다 적발되면 정치적으로 재기 자체가 불가능하다.”
―자격 미달이 많아 보이는 우리 의원들에게 예산 심의권까지 준다면 지금보다 더 엉망이 되지 않을까.
“사실 우리처럼 장차관 법원장 대학총장까지 지내고 국회의원 하겠다는 사람이 많은 나라는 선진국에서도 별로 없다. 그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된다. 물론 자질이 부족한 사람도 많다. 어느 조직이든 20∼30%는 시원찮은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문제는 집권 세력 중에서도 소수가 다수를 끌고 간다는 데 있다. 거듭 말하지만 청와대로 지나치게 집중된 권력구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때 친이(친이명박), 지금 친박(친박근혜)들을 보라. 권력자에게만 잘 보이면 공천과 요직이 보장되니까 국민은 안중에 없는 것 아닌가.”
국감서 저질 질문… 장관 창피 줘서야
“우선 바꿔야 할 것이 바쁜 사람들을 증인으로 불러다 놓고 하루 종일 한마디 묻지도 않다가 마지막에 한다는 소리가 ‘요새 회사 잘 돌아가요’라고 묻는 식이다. 대정부질문이란 것도 유신 잔재다. 독재 정권하에서 말을 제대로 못 하니까 그런 제도를 만들어 카타르시스를 주고 김을 뺀 거다. 국회 개원할 때마다 3당 대표가 돌아가며 연설하는 것도 구태의연한 관행이다. 정말 하고 싶으면 하루 날 잡아 돌아가며, 그것도 30분 이내면 될 텐데 이런 전파 낭비가 어디 있나.”
차분하던 그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청문회나 국정감사에서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 던지면서 장관들 창피 주는 걸 보는 것도 얼마나 짜증이 나나. 20대 국회는 ‘국장급 이하 공무원은 부르지 않겠다’는 선언이라도 하라.”
―국회가 정부가 필요로 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는 식으로 국정 운영에 발목을 잡고 있다는 비판도 높다.
“거기에 대해선 생각이 좀 다르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법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1년에 무려 1만여 건이고 계류되어 있는 것만도 1만5000여 건이다. 미 하원의 경우 1년에 통과되는 법안이 보통 500∼800건이다. 문제는 법을 통과시키느냐 여부가 아니라 충분하고 진지한 심의와 토론이 없다는 거다. 법안 청문회 한다고 모이면 오전 서너 시간 각자 자기 말만 하다가 오후엔 한두 사람 앉아있는 식이다. 자꾸 미국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미국은 하나의 안건을 가지고도 여섯 번, 일곱 번 심의를 한다. 예를 들어 쇠고기 수입법안을 처리한다면 수입업자, 소비자 대표까지 다 불러서 긍정 부정 효과를 꼼꼼히 따진다. 아마 토론 문화가 제대로 형성된다면 국회의원들이 일이 많아져서라도 법안을 함부로 내지 못할 것이다.”
대통령은 개헌 논의에 가만히 있기를
―국회에 그렇게 문제가 많은데 개헌이 가능한가.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요원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미묘한 기류가 느껴진다.”
―무슨 말인가.
“현직 대통령 임기가 1년 6개월이나 남은 상황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대선 후보가 마땅치 않아 그런지 개헌에 대한 공감이 높은 것 같다. 만약 유력한 후보가 깃발을 들면 정치인들이 그 앞에 줄을 설 게 뻔하고 그러면 개헌은 현실적으로도 어렵다. 한다고 해도 방향이 뒤틀릴 수 있다. 강력한 후보가 없어서 당리 당략에 흐르지 않고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다.”
―박근혜 대통령은 개헌을 ‘블랙홀’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그냥 가만 계셔도 될 것 같다(웃음). 자연스럽게 국회 논의 과정에 맡겨두면 되지 않을까. ‘블랙홀’인지 아닌지는 따져봐야 한다. 자연스러운 개헌 논의는 국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대통령 입장에서도 나쁠 게 없다. 현행 헌법은 개헌을 할 때 현직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임기를 줄이거나 늘릴 수 없고 현직의 재출마도 안 된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어 현직으로서는 잃을 것이 없다. 정치공학적으로만 따져도 차기 정부 형태를 현직이 주도적으로 만드는 형국이 되니 정국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무엇보다 공무원을 일하게 하려면 5년 단임제가 부족한 점이 많다”고 했다.
“감사원도 완전 독립까지는 아니어도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대통령 산하 조직으로 두어야 하는지 깊은 검토가 있어야 한다. 검찰 경찰 국가정보원 국세청, 이런 기관들이 대통령 수하에서 꼼짝 못 하고 있는 구조도 문제다. 역대 대통령마다 후반에 레임덕이 걸리면서 국정 동력을 잃는 것도 공무원들이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기 정권을 어떤 당이 잡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괜히 열심히 일했다가 정권 바뀌면 잘릴 걱정을 하는 것이다. 어느 대통령인들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5년이라는 시간은 위대한 업적을 내기에는 누구에게도 부족한 시간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나 의원내각제로 바꾸면 해결되나.
“개헌 논의가 그런 식으로 포괄적인 권력체제 논의로 흐르면 안 된다. 내각제만 해도 총리를 불신임할 경우 의회부터 해산하고 차기 총리를 뽑을지, 아니면 차기를 우선 뽑아놓고 의회를 해산할지처럼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국회 개혁을 위한 입법도 동시에 되어야 한다. 국회도 세종시로 옮겼으면 한다. 분원을 세우자는 주장이 있는데 그건 이중 낭비다. 다행히 그동안 개헌론에 대해 논의되고 연구된 게 많아 개헌 논의가 현실 문제가 되면 쟁점을 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박 대통령 임기 말에 개헌 논의가 결실을 거둘지, 아니면 뜨거워지는 듯하다가 또 흐지부지 끝날지 아직은 모든 게 불투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헌이라는 과일이 영글기에 좋은 조건이 무르익었지만 예측이 어려운 게 한국 정치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