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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이승헌]미국 안의 브렉시트

입력 | 2016-07-04 03:00:00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1. 지난달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오크몬트 골프장에서 열린 세계 4대 메이저 골프대회 중 하나인 ‘US오픈’ 마지막 18번홀에서는 이례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이번 우승으로 첫 메이저 대회를 차지한 미국의 더스틴 존슨이 승부를 결정짓는 마지막 퍼팅을 하려고 하자 관중이 일제히 큰 소리로 ‘USA’를 외쳤다. 선수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정숙을 지키는 것이 기본 매너인데도 미국 관중은 마치 올림픽처럼 자국 선수의 우승을 염원했다. 이 장면을 중계하던 한 방송사 캐스터는 “수많은 US오픈 대회를 봤지만 이런 장면은 처음이다. 다른 나라 선수들이 불쾌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 요즘 워싱턴 인근에선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이 운전면허증을 바꾸려면 최소한 한 달은 기다릴 각오를 해야 한다. 지난해만 해도 여권과 비자만 확인하고선 그 자리에서 1년짜리 면허증을 내주던 각 지역 교통국(DMV)이 체류 요건을 점검하는 데만 최소 2, 3주가 걸린다. 면허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일정 기간 무면허 신세로 지내며 우버와 택시에 의존하는 사람도 있다. 기자가 1일 DMV 직원에게 요건 강화 이유를 물었더니 “안전한 미국은 당신도 원하지 않나요? 수상한 사람이 미국에서 차를 몰다 사고가 나길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3. 지난달 23일 미 연방대법원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비수를 던지는 판결을 내렸다. 최대 500만 명에 달하는 히스패닉 등 불법 이민자의 추방을 유예하는 이민개혁 행정명령에 제동을 건 것이다. 워싱턴포스트가 “오바마 대통령이 법원에서 맞은 가장 큰 카운터펀치”라고 평가한 이 판결에 대해 오바마는 “이민자의 가슴은 찢어질 것”, “이민은 두려워할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판결 결과를 보면 이민자들에 대한 백인 주류의 분노와 편견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뺏긴 백인 노동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의외로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수와 진보로 정확히 4 대 4로 나눠진 대법원 판사 중 보수 4명은 모두 이민개혁 행정명령을 반대했다. 전형적인 이념투표였던 것이다.

브렉시트 후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도 영국처럼 이제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며 무슬림 입국 금지 등 강성 발언을 다시 쏟아내자 지지율이 떨어졌다. 지난달 23일 ABC-워싱턴포스트 공동조사에서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게 12%포인트까지 뒤졌다. CNN 등 미 언론은 브렉시트를 불러온 자국 우선주의가 미국에선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내놨다. 하지만 트럼프는 지난달 30일 라스무센 조사에서 깜짝 반전을 일으켰다. 43%를 얻어 39%의 클린턴을 4%포인트 차로 제쳤다. 브렉시트에 기대려던 트럼프가 역풍을 맞았다는 평가가 머쓱해졌다.

앞서 소개한 사례들이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 사회 저류엔 이렇게 ‘미국판 브렉시트’의 단면으로 볼 수 있는 여론과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사실이다.

미 대선은 이제 경선을 마쳤다. 본게임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트럼프가 11월 대선까지 미국인들의 말초신경을 어떻게 자극할지, 그래서 대선판이 다시 어떤 식으로 흐르게 될지 이제부터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이승헌 워싱턴 특파원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