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야마구치 히데코 일본 출신 이주여성공동체 ‘미래 길’ 공동대표
그 말을 듣고 거의 다 도착했나 싶어 안도했지만 좀처럼 목적지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또 물었다. “언제 도착하는데?” 남편은 역시 “다 왔다”라고 말했다. 그런 대화가 몇 차례 오고간 뒤에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 후 나는 남편의 “다 왔다”라는 말을 들으면 ‘30분은 더 가야 하겠구나’라고 판단하게 됐다. 처음에는 남편이 정확히 대답해 주지 않아 답답했지만 한국에서 살며 “멀지 않다”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저녁’이라는 개념도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저녁노을’이라는 표현이 있는 만큼 저녁은 해가 지기 전인 오후 5, 6시쯤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결혼 전 남편이 “저녁에 만나러 갈게”라고 하면 나는 남편이 오후 5시쯤 오는 줄 알고 오후 4시부터 마중하러 나가려고 4층에서 1층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기다렸다. 그런데 남편은 오후 8시가 다 돼서야 왔다.
조금씩 한국말을 알아 가며 “이따가 만나자”고 하면 그날 몇 시간 뒤, “나중에 만나자”고 하면 그날이 아닌 다른 날 만나자는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됐다. 모호한 약속에 관한 말들로 혼란스러웠다.
어느 날 버스 여행을 가는데 아침에 어떤 사람이 “갑자기 친척이 시골에서 오게 돼 못 간다”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출발 시간이 다 돼서야 “몸살 나서 못 간다”라고 했다. 더 심한 경우는 “비가 오니 나가기 싫어졌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갑자기 생기는 일이 일본보다 많은 것 같다.
누굴 보고 싶으면 바로 행동에 옮기는 게 한국의 문화이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몸살’은 일본에 없는 단어지만 여자들의 노동량이 많은 한국이니까 역시 이해한다. 하지만 “비가 와서 나가기 싫다”고 약속을 어기는 건 이해되지 않았다. 일본은 비가 자주 내려서인지 비가 온다는 이유로 약속을 취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런 일들을 겪고 나서 누군가와 약속할 때 “아침이 돼 봐야 알겠다”, “뚜껑을 열어 봐야 알겠다”라는 말을 실감하게 됐다. 오히려 일본인과 약속할 때 더 어색한 경우가 많다. 한국에 사는 일본인과 한 달 전에 약속을 하고 그 이후 한 번도 연락하지 않다가 한 달 뒤 약속 장소에서 딱 만나니 좀 무섭게 느껴졌다. 그간 서로에게 뭔가 사정이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한 달 전 약속만 믿고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은 잘하거나 못하거나 개인의 생각이나 기량 자체를 평가하지만 일본은 각자 맡은 영역을 제대로 처리해 넘기는 게 중요하다. 회사라면 하나부터 열까지 상사에게 물어보며 일을 진행해야 하고 개인의 생각이 개입되면 안 된다. 한편으로는 “알아서 하라”라는 말이 “당신 생각대로 마음대로 하라”라는 뜻으로 쓰일 때도 있어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다.
지금은 “알아서 하라”라는 말이 창조성을 최대한 높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장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정도까지 양심껏 일을 처리하면 자신감이 높아지고 본인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내게는 모호한 말이었지만 “신념대로 하라”라는 격려가 느껴지는 이 말의 개념을 정확히 알고 실천하면 누구나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경험을 토대로 말의 깊이를 알게 되고 모국 문화와 비교해 보며 다른 문화를 소화해 나가는 것은 행운이다.
야마구치 히데코 일본 출신 이주여성공동체 ‘미래 길’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