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간 고문서와 씨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최고참 안승준 책임연구원
《 “버리려면 얼마나 드려야 하죠?” “더 주셔야 되는데….”
1980년대 말의 어느 늦은 저녁, 서울 잠실 장미아파트의 복도에 아주 낡은 종이와 책 더미가 일주일째 쌓여 있었다. 한 여성과 청소원이 이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비용을 두고 옥신각신했다. 30대 후반으로 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 조교이던 안승준 씨(56)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제가 가져갈게요!”
이 일이 있기 얼마 전 안 씨는 미국 이민을 앞둔 60대 종손의 고민을 전해 들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온 문서가 있는데, 평소에도 ‘냄새나고 자리만 차지한다’고 눈치를 주던 자식들이 ‘버리고 가자’고 했다는 것. 안 씨는 쓰레기로 버려질 뻔했던 문서를 종손으로부터 기탁받은 뒤 분석했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고 과거 합격자를 많이 냈던 한 집안이 보관해 온 교지(敎旨·임금이 내린 문서), 간찰(편지), 시문집 등 1500여 점이었다. “종손의 부친이 6·25전쟁 당시 불타는 집에서 재물을 팽개쳐둔 채 지고 나온 고문서였다고 하더군요. 만약 요즘 시장에서 거래된다면 1억 원은 넘을 겁니다.” 》

전국의 고문서를 조사하는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오른쪽)이 지난달 23일 경북 울진군 기성면의 평해 황씨 해월공파 종택에서 종손 황의석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안승준 책임연구원 제공
“○월 ○○일, 재작년 분양했던 송아지가 커서 새끼를 낳았다. 새끼는 주고, 어미 소는 돌려받았다.”
안 씨가 재채기만 세게 해도 바스러질 듯한, 누렇게 바랜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가 살피는 문서는 왕실이나 고관대작의 것이 아니다. 평범한 이들이 금전·재물 거래를 적은 치부(置簿), 사사로운 소식을 주고받은 간찰, 관청에 원하는 바를 적은 민원 등이다.
“하찮은 게 아닙니다. 평범한 양반 서민 노비들이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가 나와 있어요. 우리 정신문화유산의 7, 8할은 고문서에 담겨 있습니다.”
올 4월 입수한 진주의 재령 이씨 종가 문서에서는 노비가 한글로 쓴 계(契) 문서가 최초로 나왔다. 재령 이씨 문서 2만 점을 분석하려면 한 해가 훌쩍 갈 것이다.
“동구 밖까지 따라 나와 손을 부여잡으며 ‘이 문서가 저에게는 곧 조상입니다. 부디 잘 살펴주세요’라 말하던 종부(宗婦)들의 눈물을 잊지 못합니다.”
고문서는 스스로 ‘여기 있다’고 소리치지 않았다. 안 씨는 기탁을 기다리는 대신 전국 주요 가문을 ‘저인망식’으로 훑었다. 족보학을 부전공해 양반들의 학파와 정파, 혼맥을 머릿속에 꿰었다. 조사할 집안의 목록을 만들고 600차례 전국의 고택을 다녔다.
그렇게 원나라 최후의 법전으로 중국에는 남아 있지 않은 ‘지정조격(至正條格)’을 경주 손씨 집안에서 확인했고, 평민과 천민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문서인 경남 거제도 어촌 구조라 마을 고문서 1000여 점을 찾아냈다. 문화 류씨, 해남 윤씨 집안 등에서는 한 번에 1만여 점이 나왔다. 안 씨는 조선 전기 사노비의 경제적 성격을 밝힌 논문, 조선시대 평민들의 생활사를 담은 책을 비롯해 논문과 저서 60여 편을 냈다.
안 씨는 “10년 전부터 대구의 고서점에 중국 상인들이 찾아와 유학 관련 고문서와 전적을 싹쓸이했다”며 “우리가 홀대하는 고문서를 가지고 그들은 박물관 콘텐츠로 사용한다”고 말했다.
정년을 4년 앞둔 안 씨는 큰 고민이 있다. ‘후임자’ 문제다. 고문서 조사는 공은 많이 들고 빛은 안 나는 일이다. 안 씨는 “연구자는 있지만 흘려 쓴 초서가 대부분인 고문서를 능란하게 읽을 수 있는 이도 적고, 고문서의 수집 자체에 의미를 두는 후학이 없다”며 “전국 종·지손가와 30여 년 쌓아온 네트워크가 없어질까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