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국의 약탈 대상이었던 해삼.
황광해 음식평론가
영조 10년(1734년) 5월, 황해 병사 민사연이 파직되었다. 병사(병마절도사)는 종2품 무관, 고위직이다. 그 전해 6월, 황당선이 황해도 옹진반도 경계에 정박했다. 병사가 군대를 보내 그들을 쫓으려 했지만 오히려 우리 측 군인들이 중국 뱃사람들에게 맞고 무기를 빼앗겼다. 병사의 지휘 책임이 있다. 민사연은 내용을 숨기고 거짓으로 보고한다. 관찰사가 이 내용을 조정에 보고, 민사연은 파직된다(‘조선왕조실록’). 중국 배의 흉포함은 역사가 깊다.
황당선이 우리 바다에 적극 진출하고 약탈한 것은 숙종 23년(1697년) 이후다. 그해 조선이 흉년을 당해 중국 측에서 곡식을 보내준 적이 있었다. 이때 중국인들이 황해도 앞바다의 해로를 익혔고, 그 이후 해삼 등을 채취하기 위하여 여름과 가을 등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해서(海西·황해도)’ 일대에 나타나 불법 조업, 약탈을 했다. 황당선이 수백 척이나 되니 조선의 지방 수령들과 군인들은 감당치 못했다. 일부는 몰래 술과 양식을 주면서 그들을 달래어 떠나게 했다.
18세기 무렵에는 주 약탈 대상이 해삼이었지만 황당선은 시기별로 여러 가지 해산물을 약탈했다. 조선 후기에는 청어가 약탈 대상이었고, 조선 전기에는 소금을 빼앗아 가기도 했다.
중종 39년(1544년) 7월, 전라도 병마절도사 한기의 보고 내용이다. “군산도(群山島)를 수색하다 정체불명의 우리나라 사람 넷을 잡아서 조사했다. 이들은 ‘우리는 한산(韓山)의 염간(鹽干)이다. 여덟 사람이 소금을 싣고 황해(黃海)지방으로 가던 중, 마량(馬梁·서천 부근) 앞에서 수상한 배를 만났다. 이들에게 소금을 약탈당했다. 일행 중 네 명은 물에 뛰어들어 생사를 모르겠고 도적들이 우리 넷을 횡간도(완도 부근)에 버려두고 떠났다’고 한다.”(‘조선왕조실록’)
염간(鹽干)은 소금 굽는 이들이다. 황당선은 서해 일대에 출몰해 소금, 해산물 등을 가리지 않고 채취하거나 약탈했다. 숙종 43년(1717년)의 기록에는 ‘황당선이 오늘날같이 많이 나타난 적이 없다. 한꺼번에 32척이 나타났다’는 내용도 있다. 조선 정부는 이때도 중국 측에 외교문서를 보내는 등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조선왕조실록’)
영조 13년(1737년) 9월에는, ‘황당선이 고기를 잡는 핑계로 우리 측 내륙 가까이에 온 다음, 등산진(황해도 옹진반도)에 상륙, 부녀자를 겁간하는 일’도 발생했다. 조선 정부도 황당선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대처하기는 힘들었다. 예전에도 중국과의 ‘외교 분쟁’이 문제였다.
‘만(蠻)’은 무지막지한, 벌레 같은 자들이다. ‘어만자’는 물일 하는 무지막지한 자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만자’들은 막가파다. 중국인들이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막가파’ 황당선에 대처하는 우리 측의 희생이 너무 안타깝다.
황광해 음식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