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협회 초대 회장 한성옥 작가
한성옥 작가는 그림책협회 일을 하며 자신도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림책은 애니메이션, 뮤지컬 등 여러 분야로 콘텐츠를 확장할 수 있다. 작가들의 잠재력을 활용하지 않는 건 엄청난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한성옥 그림책 작가(59)는 5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나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지난달 출범한 그림책협회 초대 회장(임기 2년)으로 선출된 터였다. 하지만 볼로냐 국제어린이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나의 사직동’, 2005년)된 데다 미국일러스트레이터협회상(‘시인과 요술 조약돌’, 2005년)을 수상한 작가와 어떻게 협회 이야기만 할 수 있단 말인가. 미국에서 낸 ‘시인과 여우’ ‘황부자와 금돼지’는 미국 초등학교 교재로도 선정됐다. ‘한국 그림책 1세대’인 그의 작품은 순간을 따뜻하고 섬세하게 포착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
“인정받는다는 건 감사하고 즐거운 일이죠. 한데 그림책 강의를 듣고 새로운 세계와 만났다며 기뻐하는 독자를 볼 때가 진짜 좋아요.”
그런데 4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독한 슬럼프가 찾아왔다. 뜻밖이었다. 날카롭기만 해 데면데면하게 지낸 아버지였다.
“지병도 없던 분이 갑자기 떠나시자 멍해지는 거예요. 아버지도 가슴에 상처가 많았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고요. 사는 게 혼란스러웠어요.”
3년 넘게 홀로 침잠했다. 그를 깊은 늪에서 끄집어낸 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그림을 그린 작품이었다. 후배의 간곡한 요청으로 ‘시인과 여우’에 대해 강의하러 간 날이었다. 미국 작가 팀 마이어스가 이야기를 쓴 이 그림책은 그 자신이 너무나 잘 아는 내용이었지만, 강의를 하다가 새롭게 깨달았다.
“시인이 버찌를 따 먹은 여우와 내기를 해요. 멋진 시를 쓰면 버찌를 차지하기로요. 계속 여우에게 퇴짜를 맞죠. 머리를 쥐어짜지만 시를 못 쓴 채 약속 장소로 나가는데, 달빛 아래서 여우를 본 순간 시가 튀어나오죠.”
“시를 못 썼음에도 불구하고 여우를 만나러 가잖아요. 인생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길을 가는 거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는 요즘 에너지를 협회에 쏟고 있다.
“그림책진흥법을 만들어 그림책이 독립된 장르가 되도록 하는 게 목표예요. 그림책과 동화는 엄연히 다른데 우리는 동화작가로 분류돼요. 이름을 찾아야죠.”
장르가 없다 보니 정부의 지원을 받기도 어렵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한국 작가들은 해외에서 먼저 인정받았다. 이수지, 백희나, 김희경, 유주연 작가 등이 볼로냐 국제어린이도서전과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 일러스트레이션 비엔날레(BIB)에서 수상하는 등 권위 있는 상을 휩쓸고 있다.
협회를 운영하고 법 제정까지 이뤄내는 건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두렵지는 않을까.
“영화계에서 스크린쿼터제를 위해 배우들이 삭발까지 했잖아요. 그 정도 각오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해요. 동료들과 ‘빠샤’를 외치며 함께 나가야죠. 하하!”
지금도 그림책 작업을 하고 있지만 출간은 회장 임기가 끝난 후 할 계획이다.
“어린이와 어른이 다 같이 볼 수 있는, 통찰을 담은 책을 내고 싶어요. 나이를 먹으니 봄이 여름을 지나 어떻게 가을을 맞이하는지, 삶이라는 순환의 고리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더라고요.”(웃음)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