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노 다모쓰 ‘일본회의 연구’
1966년 7월 3일. 일본 규슈(九州) 나가사키(長崎)대 정문 앞.
우익 성향의 대학생 안도 이와오(安東巖)와 가바시마 유조(P島有三)는 ‘학내 데모를 반대한다’는 유인물을 배포하다 좌익 학생운동 진영에 붙잡혀 구타를 당했다. 얻어맞은 후 밤새 만든 전단이 나뒹구는 모습을 보며 둘은 ‘좌익 학생운동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두 대학생은 이날 이후 조직을 만들어 학내 선거에 매달렸고 온갖 수모와 폭력을 당하면서도 선거에서 연전연승했다. 바리케이드를 철거하고 대학을 좌익 학생으로부터 되찾아온 이들은 우파 진영의 ‘상징’이 됐다.
둘은 신흥 우파 종교단체 ‘생장의 집(生長の家)’ 신도였다. 그들은 종교 조직을 바탕으로 우익 학생운동의 범위를 전국으로 넓혔다. 폭력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합법의 테두리에서 끈질기게 싸우는 것이 이들의 방식이었다.
생장의 집은 이후 정치 노선을 포기했다. 하지만 소속 청년들은 멈추지 않았다. 아베 총리의 측근인 에토 세이이치(衛藤晟一) 보좌관, 아베 총리의 브레인인 이토 데쓰오(伊藤哲夫) 일본정책연구센터 대표 등 정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위에 올랐다. 아베 총리의 정치적 후계자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정무조사회장의 경우 “할머니로부터 받은 (생장의 집 경전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주역이었던 가바시마는 일본청년협의회를 만들고 본격적인 우익 활동을 전개했다. 1995년 일본이 침략전쟁의 책임을 인정하는 ‘전후 50년 결의’를 추진할 때 ‘500만 반대서명’을 모은 것도, 자민당 간사장의 넥타이를 쥐고 흔들어 결의안 참의원 통과를 막은 것도 그였다. 저자는 안도 역시 생장의 집 내에서 비공식적으로 관련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본다.
집요한 노력의 결과 그들은 현재 아베 총리를 포함해 아베 정권 각료의 80% 이상이 참여하고, 국회의원 281명이 소속된 막강한 단체로 성장했다. 이들은 전후 최초의 ‘개헌’을 목표로 1000만 명의 서명을 받는 총력 투쟁을 전개 중이다.
저자는 일본회의의 최종 목표가 일왕을 중심으로 한 국가신도주의를 표방한 ‘메이지 헌법’의 복원이라고 분석한다. 비민주적 목표를 위해 철저하게 민주적인 방식으로 싸우는 것이 일본회의의 아이러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던 저자는 직장을 그만두고 책을 쓰기 위해 꼬박 1년 동안 일본회의 관련 자료와 증언을 수집했다. 일본회의는 책이 출간되자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며 출판사에 출판 중단을 요청했으나 이런 사실 등이 화제가 돼 두 달 만에 12만 부 이상 팔렸다.
도쿄=장원재 특파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