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산업 1세대 창업자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의 집무실에는 위아래가 뒤집힌 세계지도, 대형 지구본 등이 있다. 발상을 바꿔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골프를 즐기는 그는 2009년 9월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과 함께 친 골프에서 75타를 쳐서 ‘에이지 브레이크’(나이보다 적은 타수)를 기록했다. 그때 받은 기념패가 지금도 집무실에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박용 기자
선장 출신 창업가인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81)은 “고기를 못 잡는다고 선원을 탓해선 안 된다”며 리더의 책임을 강조했다. 우리 국민이 매우 우수하기 때문에 기업 경영자, 정치 지도자 등 리더의 역할이 막중하다는 것이다. 5일 김 회장을 서울 서초구 마방로 동원산업 집무실에서 만났다.
“해양산업 국가전략으로 육성 필요”
“당장은 충격이 제한적이지만 길게 보면 고립주의 사상이 침투해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영국 국민투표 이튿날 ‘브렉시트가 뭐냐’, ‘EU가 뭐냐’는 질문이 구글 검색 순위 1, 2위였다는 얘길 듣고 깜짝 놀랐어요. 정치인들의 선동에 뭔지도 모르고 투표했다는 뜻이잖아요. 사회가, 세계가 감각적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해야 해요. 그럴수록 지도층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영남권 신공항 논란 등에서 정치인의 선동에 대한 비판이 있었습니다.
“정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제 영역 밖의 일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지도층이 말한 것을 지키는 것,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을 남한테 강요하지 않는 겁니다.”
―한국 경제, 특히 수출과 교역 감소에 대한 걱정도 많습니다.
“세계 경제에 비하면 그렇게 나쁘진 않아요. 단지 성에 차지 않는 거죠. 물론 교역 내용을 바꿔야 합니다. 보호무역으로 상품에 대한 무역장벽이 갈수록 높아질 겁니다. 상품 외에 한류 의료관광 인력 수출 등 ‘복합무역’을 키워야 합니다. 가난하기 짝이 없던 나라에서 이 정도 한 건 대단한 거예요.”
―지나친 열패감을 버려야 한다?
―해운업과 조선업 분리 정책이 오늘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최근 세계 해운업이 재편될 때 대우조선이 덴마크 해운회사인 머스크에 대형 컨테이너선 20척을 지어줬어요. 돈은 수출입은행 등이 대줬죠. 우리 돈으로, 우리 기술로 엄청난 무기를 지어준 거죠. 감독기관이 제조업체처럼 부채비율이나 따지니 우리 해운회사는 지금도 그런 큰 배가 없어요. 그 돈을 우리 해운업에 대줬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겁니다. 해양수산부가 폐지돼 없었을 때 생긴 일입니다. 정책을 종합적으로 보는 안목이 없으니 어렵다는 취지로 얘기한 겁니다.”
―해양산업을 위한 국가 전략이 없다는 건가요.
“조선, 해운업과 같은 해양산업은 국경이 없어요. 오늘 우리 바닷물이 내일 일본에 가고, 저 멀리 오지의 바닷물이 언젠가 한국에 와요. 한 국가에 한정해 생각할 순 없는 겁니다. 한 기업이 잘했다 못했다만 따져도 안 돼요. 국가 전략의 관점으로 봐야 합니다. 한국에 세계 1등부터 3등까지 조선소가 다 있어요. 이걸 국력과 연결시켜야 하는데 과잉 경쟁이나 하고 분식 결산을 하도록 방치한 것 아닙니까.”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한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부두고, 중국과 일본은 방파제 모양입니다. 부두는 자유롭게 배가 드나들어야 번성해요. 문을 닫아놓으면 망하는 겁니다. 북한이 아주 좋은 사례 아닙니까. 지금 굉장히 좋은 기회가 오고 있습니다. 얼음이 녹고 선박 건조와 운용 기술이 향상돼 북극항로가 열리면 여기서 유럽까지 가는 항로가 3분의 1 또는 5분의 1로 줄어듭니다. 그땐 부산 포항 광양 등이 인도양의 관문 ‘싱가포르’처럼 번성할 수 있어요. 안타깝게도 이런 인식이 아직 부족해요.”
“정부지원 타령, 기업가 자세 아냐”
―한국 기업끼리 출혈 경쟁으로 공멸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바다엔 4가지 부류의 선장이 있어요. 가장 고기를 잘 잡는 선장은 기술이 좋고 늘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은 그런 선장하고 친한 사람입니다. 어장은 부자지간에도 속인다고 하거든요. 셋째는 기술은 없지만 부단히 애쓰는 선장입니다. 제일 고기를 못 잡는 선장은 ‘어디가 잘 잡힌다’는 소문만 쫓아다니는 선장이에요. 다들 만선이 돼 돌아갈 때 따라 들어가면 파장인 거죠. 우리 사회에 그런 게 많아요. 잘된다면 막 몰립니다. 남이 안 한 업종, 새 어장에 도전하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서비스산업의 경쟁력도 여전히 떨어집니다.
“바다를 평생 못 보거나, 황해처럼 누런 바다만 아는 중국인이 많아요. 우린 푸른 바다가 얼마나 많습니까. 생각만 바꾸면 태풍도 좋은 관광 상품이 돼요.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려와 깨지는 것을 발밑에서 본다고 생각해 보세요. 국민들이 창의력을 발휘하도록 하고, 규제를 완화한다면 할 수 있는 게 아직 많아요.”
―무역협회장 재임 중 행정 규제 개선을 자주 언급했는데요.
“김영삼 정부에서 행정쇄신위원으로 4년간, 김대중 정부에서 규제개혁위원으로 3년간 일하면서 규제 개혁은 통치자의 강한 의지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걸 느꼈습니다. 규제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러니 없애기 어렵죠. 그래도 우리 공무원들이 우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신나서 일하게 싱가포르처럼 보수도 올려주고 대우도 잘해줘야 합니다.”
김 회장은 1999∼2006년 한국무역협회장으로 일했다. 2002년 “나라가 잘되려면 공무원 수를 절반으로 줄이되, 보수를 배로 높여줘야 한다”고 주장해 당시 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바다가 아니라 정부청사에서 고기 잡는 사람들이 있다”고 비판한 적도 있습니다.
“‘정부 지원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을 보면 ‘아, 저건 기업가의 자세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가 정부 지원을 받아서 잘됐나요? 제도나 국가 전략에 따라 지원이 필요하다는 건 이해하지만, 자기 사업 하는 데 정부에 지원해 달라고 매달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반(反)기업 정서도 상당합니다.
“기업의 잘못이 큽니다. 하지만 우리의 조급함도 있다고 봐요. 사업 하는 사람을 제일 욕되게 하는 말이 ‘재벌’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이 듣기 싫어 사업도 너무 크게 안 하려고 해요. 내 컨트롤 밖에 있는 것은 영광보다 욕이 더 많으니까요. 지고 갈 만큼만 져야죠.”
“새 어장 찾는 맘으로 6차산업 개척”
―곧 창업 50년인데, ‘100년 기업’의 비전은 뭔가요.
“내가 설계도를 그려두면 안 돼요.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일본에 ‘본업을 버리는 자는 망한다. 본업만 하는 자도 망한다’는 말이 있어요. 기업 경영은 환경 적응력이고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만이 안 변한다’고 하잖아요. 다만 ‘사회에 필요한 기업이 돼라’는 말은 해요. ‘그 회사가 있어 좋다’는 말이 나오면 그걸로 돼요.”
전남 강진 출생인 김 회장은 1958년 부산수산대 어로학과를 졸업하고 실습항해사로 남태평양으로 첫 항해를 시작했다. 1969년에는 34세에 동원산업을 세워 원양어업(1차산업)을 개척했다. 이어 참치 캔 등 식품 가공업(2차산업), 금융업(3차산업) 등에 진출했다. 동원그룹은 최근 포장재, 물류, 온라인 식품유통으로 사업을 다각화하고 있다. 김 회장은 “새 어장을 찾는 기분으로 생산 유통 판매 등이 융·복합된 6차산업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동원그룹이 위기 때마다 성장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재산은 현금이나 부동산과 같은 것이고, 눈에 안 보이는 재산이 바로 신용입니다. 동원이 오일쇼크, 외환위기, 금융위기 등을 거치며 부쩍 성장한 건 신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돈이 안 돌아가는 것이 위기 아닙니까. 그땐 있는 사람들이 돈을 다 거둬들여 틀림없는 데만 주거든요. 동원이 그래서 성장한 겁니다.”
―신용이 위기 때 빛을 발하는 거군요.
“1250만 달러(약 144억 원)를 차관해 1975년 큰 배를 샀습니다. 일본 미쓰비시(三菱)상사가 ‘김재철’ 신용 하나만으로 큰돈을 빌려준 겁니다. 그것이 성장에 큰 발판이 됐어요. 지금도 직원들이 거짓말하면 매섭게 혼내요. 거짓말은 인격을 파는 것이고, 신용을 떨어뜨리니까요.”
―가업 승계의 원칙은….
“첫째, 법은 악법이라도 지켜야 합니다. 둘째, 권력이나 돈은 부자나 친인척끼리도 적을 만듭니다. 미리 가닥을 치고 경계를 둬야 합니다.”
동원그룹은 2001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고, 2004년 차남 김남정 동원엔터프라이즈 부회장이 몸담고 있는 동원그룹과 장남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이 이끄는 한국투자금융그룹으로 계열 분리를 마쳤다.
―‘장남을 남몰래 원양어선에 태웠다’고 해서 ‘김재철식’ 교육법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외국에 유학 간 손자도 하루 12시간씩 한 달간 공장에서 일을 시켰어요. 자식에게 가장 물려주기 싫지만, 그래도 꼭 경험을 하게 해줘야 하는 게 바로 고생입니다. 일본에서 ‘아이를 키울 때 천장을 낮게 하지 마라’는 말도 해요. 기상을 키워야 한다는 말인데요. 공간적으로 세계를 넓게 보고, 시간적으로 과거에 대한 기억력, 현재에 대한 판단력, 미래에 대한 상상력을 기초로 한 역사 인식이 있으면 틀린 판단을 하진 않을 겁니다.”
―지금도 글을 자주 쓰십니까.
“인간 혀의 미각이 여든이 되면 40%가 떨어진다고 하데요. 골프 드라이버샷도 20∼30% 덜 나가거든요. 능력의 한계고, 신이 주신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이젠 안 쓰고 주로 봅니다만, 배를 타는 동안 일기를 죽 썼어요. 요즘 말로 자신만의 빅 데이터를 만드는 겁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잘하더군요. 휴대전화나 컴퓨터로 더 편하게 정리할 수 있잖아요. 언제 누굴 만났고 화제가 무엇이었는지 딱 치면 다 나오니, 굉장한 자산이 될 겁니다.”
그는 타고난 문장가이자 독서광이다. 그가 쓴 ‘거센 파도를 헤치고’ ‘남태평양에서’ ‘바다의 보고’가 초중고교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독서량을 보여주듯 인터뷰 도중 역사학자 폴 케네디,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 이승만 전 대통령 등 다양한 석학과 유명인의 발언을 자주 인용했다. 이만열(이매뉴얼 패스트라이시)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의 책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를 건네며 일독을 권하기도 했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이 기사에는 구특교 인턴기자(서강대 중국문화학과 4학년)가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