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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성의 오늘과 내일]음지의 서별관, 투명한 웨스트윙

입력 | 2016-07-12 03:00:00


황재성 경제부장

“없애라” “안 된다”, 국회를 중심으로 서별관회의를 둘러싼 존폐 논란이 뜨겁다. 존치론자들은 “중요 경제 현안을 논의하는 비공식 협의(기구)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폐지론자들은 “‘관치금융의 온상’이라며 당장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정부가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서별관회의 내부 문건까지 공개하며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이런 논란들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미국 드라마 ‘웨스트윙(The West Wing)’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웨스트윙은 1999년부터 2006년까지 7년에 걸쳐 방영된 미국 방송사상 최고의 정치 드라마로 꼽힌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자 출신 제드 바틀릿 대통령과 그의 참모진이 대통령 공식 집무실인 ‘백악관 서(西)관’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주로 그렸다. 자칫 딱딱하고 어려울 수 있는 정치 얘기를 다뤘지만 다이내믹한 편집과 사실감 높은 에피소드로 방송 내내 미국에선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미국의 TV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에미상’의 TV 드라마 시리즈상을 4년 연속 수상했을 정도로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국내에서의 인기도 뜨거웠다. 방영된 에피소드 중 상당히 많은 스토리가 우리 현실 정치와 겹쳐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국내 정치인이 이 드라마의 팬임을 자처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생전에 “요즘 웨스트윙을 보면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역동적인 리더십을 부러워하고 있다”고 말했을 정도다. 2008년 말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서진이 “미국 민주당의 국정기획 방향 등에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웨스트윙’ 7개 시리즈를 구입했다”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청와대 서쪽 별실에서 이뤄지는 서별관회의는 외국 언론에 ‘West Wing meetings’로 번역돼 소개된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두 곳의 역할은 매우 다르다. 웨스트윙은 미국 대통령의 공식 집무실인 만큼 국정 전반이 다뤄진다. 결정된 사안들은 대부분 대변인실을 통해 공개된다. 그 과정에서 여야 의원들과 끊임없이 사전 조율을 벌인다. 반면 서별관회의는 경제 관련 현안을 다루며, 임시회의 성격이 강하다. 구조조정과 같은 특별한 현안이 있을 때에만 소집된다. 음지를 지향한다. 모임 내용은 물론이고 모임 자체도 비밀에 부치기 일쑤다.

웨스트윙에서는 활발하고 자유로운 토론이 쉴 새 없이 이뤄진다. 또 권력을 다루지만 암투는 없고, 모든 갈등이 논쟁을 통해 해결된다. 심지어 논리적으로 맞는다면 정적(政敵)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적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결정까지 내린다. 서별관회의는 참석자들의 설명이나 언론 보도 등을 고려할 때 국무회의 등 공식적인 회의석상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라고 한다. 하지만 활발한 정책 토론보다는 청와대 측의 일방 통행적인 요청과 이에 대한 관련 정부 부처들의 대책 마련이 논의되는 수준 정도가 대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최근 홍기택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의 돌발적인 고백을 통해 이 같은 정황은 고스란히 드러났다.

물론 웨스트윙은 드라마고 판타지다. 현실과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거기에는 일반인들이 열망하는 가치와 기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별관회의가 웨스트윙처럼 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비밀주의와 폐쇄성으로 일관하고, 국민의 오해만을 불러일으키는 현재의 행태로는 곤란하다. 국민과의 소통은 현 정부 출범 초기부터 핵심 과제였다. 차제에 서별관회의 관계자들이 웨스트윙을 시청해 보길 권한다.

황재성 경제부장 jsonh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