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2> 여주 흔암리 유적 발굴한 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
임효재 서울대 명예교수가 7일 경기 여주시 흔암리 유적 근처에 재현된 움집 앞에서 탄화미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여주=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1975년 11월 경기 여주시 흔암리 발굴 현장. 이곳을 찾은 선배 교수들이 임효재 당시 서울대 고고학과 전임강사(75·서울대 명예교수)를 미덥지 않은 눈으로 바라봤다. 땅을 파기도 빠듯한 시간에 임효재가 이끄는 발굴팀은 화덕 자리(爐址·노지)의 흙을 여섯 포대나 퍼 담아 연구실에서 온종일 분석에 매달렸다. 교수들은 궁금했다.
“도대체 뭘 찾아내려는 건가?” “불에 탄 쌀(탄화미·炭化米)을 찾고 있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낱알도 찾기 어려운데 땅속에서 그 미세한 걸? 음 알겠네….”
유구에서 토기와 같은 인공(人工)의 유물을 찾아내는 게 발굴의 전부였던 당시 국내 고고학계에서 자연 유물을 찾는 것은 시도된 적이 없었다. 40여 년 만에 흔암리 유적을 다시 찾은 임효재는 “모두들 반신반의했지만 한반도 최고(最古)의 탄화미를 결국 찾아냈다”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과도 맞바꿀 수 없는 내 인생 최고(最高)의 유물”이라고 회고했다.
○ 일본 학계의 ‘한반도 전파설’을 깨뜨리다
1976년 4월 발견된 탄화미.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10세기 것으로 추정됐다.
1976년 4월 여주 흔암리 현장 연구실. 핀셋으로 부유물을 하나씩 헤집으며 한참 돋보기를 들여다보던 서울대 학부생 이남규(현 한국고고학회장·한신대 교수)가 임효재를 급하게 불렀다. 전형적인 타원형의 탄화미였다. 꼬박 6개월 동안 충혈된 눈으로 작업한 끝에 나온 값진 성과였다. 앞서 임효재는 1972∼1975년 미국 텍사스주립대 유학 시절 부유법을 배웠다. 임효재는 “1970년대 초반까지 우리 학계는 농경유적에서조차 곡물을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눈 뜬 장님’과 같은 처지였다”고 말했다.
학계는 흥분했다. 벼농사 기원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한반도 전파설이 깨졌기 때문이다. 1970년대까지 일본 학계는 후쿠오카(福岡) 현 이타즈케(板付) 유적에서 발견된 탄화미의 연대(기원전 3~4세기)가 김해 패총보다 빠르다는 이유로 벼농사가 중국 남부에서 일본 열도를 거쳐 한반도로 전파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흔암리 탄화미 발견을 계기로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이로써 세계 고고학 교과서의 내용도 바뀌었다. 임효재는 벼농사의 황해 횡단설을 제기했다. “중국 양쯔(揚子) 강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 중부지방으로 벼농사가 들어왔다고 봅니다. 이후 한강을 따라 퍼지면서 일본 열도까지 전해진 것이지요.”
○ 아시아 문화교류사 열쇠를 찾아
1975년 탄화미를 얻기 위해 흙을 물에 넣은 뒤 체질을 하고 있다. 서울대 박물관 제공
특히 흔암리 유적은 자연유물이 고고학 연구의 중요한 연구 분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임효재의 제자인 이경아(미 오리건대 교수) 안승모(원광대 교수) 김민구(전남대 교수) 등이 식물고고학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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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