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기사 게재 보류 요청하러 NYT 발행인 설즈버거 만났으나, ‘고려해보겠다’고 말한 설즈버거, 열흘 뒤 기사 게재 권력이 기사협조 요청할 때 무슨 얘기인지는 들어보되 언론 스스로 결정해 판단해야
송평인 논설위원
백악관은 NYT의 기사 게재를 이미 한 번 막은 적이 있다. 멀리 1971년 국방부의 베트남전 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 얘기가 아니다. 부시 대통령이 게재 보류를 요청한 바로 그 기사를 놓고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과 마이클 헤이든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나서 NYT를 설득해 한 번 보류시켰다. NYT가 다시 기사를 게재하려 하자 이번에는 부시 대통령이 설즈버거 발행인을 상대로 직접 설득에 나선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NYT가 테러리스트 감시 프로그램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면 적들이 안보와 관련한 중요한 사실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이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설즈버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기사 게재를 보류해 달라고 촉구했고 설즈버거는 내 요청을 고려해 보겠다고 말했다”고 썼다. 설즈버거와 켈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그러나 대통령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NYT는 열흘 뒤 기사를 게재했다.
NYT의 설즈버거는 자기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국가 안보와 직결된 기사의 게재를 보류해 달라고 촉구하던 부시 대통령의 요청을 거부했다. KBS는 그러지 못했다. NYT는 백악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지만 KBS는 청와대의 눈치를 봐야 하지 않느냐는 반박이 나올 만하다. 맞다. 그러나 다른 측면도 있다.
김 전 국장이 이 전 수석과의 전화 통화 중 변명하듯 말한 것처럼 KBS 조직 내부의 성격상 정말 중요한 기사였으면 국장이라도 함부로 뺄 수 없다. KBS는 노조의 감시가 강한 조직이다. 이 전 수석의 요구는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기사를, 그것도 이미 한 차례 보도가 된 기사를 빼달라는 것이었으니까 김 전 국장이 티 안 나게 빼줄 수 있었다. 둘이 짜고 몰래한 좀도둑 짓에 언론의 자유라는 거창한 자를 들이대는 것 자체가 우습다.
KBS는 일방적으로 정권에 당하는 조직이라고 여기면 오산이다. 다만 KBS와 정권의 관계가 어떨 때는 가학적이고 어떨 때는 피학적일 뿐이다. KBS는 문창극 보도에서는 악마의 편집을 하며 가학적인 입장에 섰다.
이 전 수석과 김 전 국장의 통화를 듣고 있노라면 가학-피학 관계가 교차되는 두 남자를 보는 묘한 느낌이 든다. 이 전 수석은 화가 난 듯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계속 봐달라는 식으로 읍소를 하고, 김 전 국장은 수세적인 것 같으면서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보도지침이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일방통행식 관계는 없다.
부시처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기사에 대한 협조를 당부하는 것은 아주 예외적이다. 그 예외적인 순간에 설즈버거는 대통령의 요청에 ‘고려해 보겠다’고 답했다. 예의상 한 말이든 진짜 고려해 보겠다고 한 말이든 큰 차이는 없다. 권력의 요청이 애초 터무니없다고 여기면 예의상으로 고려해 보겠다고 말하는 것이고, 일리가 있다고 여기면 그것까지 고려해서 판단하는 것이다. 이 ‘고려해 보겠다’는 말 속에 가학-피학 관계를 넘어선 권력과 언론의 정상적 관계가 들어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