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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보기 힘들다, 볼 수 있다, 매우 보여진다

입력 | 2016-07-14 03:00:00


2014년 개봉작 ‘라스트 홈’.

이승재 기자

영화 대사 한 줄이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어차피 대중들은 개돼지들입니다.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라는, 영화 ‘내부자들’ 속 권력자 백윤식의 대사 말이다. 이 말은 알고 보면 관객의 공분(公憤)을 자아내기 위한 영화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이 대사를 듣고 ‘아하! 난 개돼지에 절대로 속하지 않아. 나는 상위 1%니까. 하하하’라며 기분 좋아할 관객은 세상에 별로 없을 것이므로. 공분이란 최대 다수의 최대 공감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정서인 것이다.

그런데 ‘내부자들’의 명대사는 따로 있다. 백윤식이 “어떠어떠하다고 보기 힘들다, 볼 수 있다, 매우 보여진다…. 같은 말이어도 누구에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힘 가진 자는 무슨 극악무도한 짓을 하더라도 대부분 ‘나쁘다고 보기 힘들다’고 표현되지만, 힘없는 자는 웬만하면 ‘나쁘다고 볼 수 있다’, 심지어는 ‘나쁘다고 매우 보여진다’로 치부된다는 얘기다.

이번에 지탄을 받게 된 고위관료는 이런 논리가 거꾸로 적용된 경우다. 일도양단하자면 한국사회에서 그는 ‘힘 있는 자’로 분류되기에, 힘없는 다수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나쁘다고 보기 힘든’ 게 아니라 외려 ‘나쁘다고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나쁘다고 매우 보여지는’ 것이다. 이처럼 대중의 공분은 북핵보다 무섭다.

올해 상반기 국내 개봉 영화들에서도 폐부를 찌르는 명대사들을 찾아볼 수 있다. 세계 금융위기를 초래한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다룬 영화 ‘라스트 홈’엔 집을 잃고 쫓겨나는 사람들의 등에 칼을 꽂는 서슬 퍼런 대사가 나온다. “이 나라는 패자를 구해주지 않아. 오직 승자들을 위해 세워졌지. 승자의, 승자를 위한, 승자에 의한 나라이니까.” “100명 중 단 한 명만 방주에 올라타는 거야. 나머지는 물 밑으로 가라앉는 거지.” 그렇다. 공분을 자아내기 딱 좋은 ‘상위 1%론(論)’인 것이다. 할리우드도 한국처럼 공분이 돈이 되는 시장인가 보다.

미국 여성 사업가의 성공 실화를 옮긴, 제니퍼 로런스 주연의 영화 ‘조이’에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대사가 등장한다. “착각하지 마. 세상은 당신에게 빚이 없어.” 아, 동정 없는 세상은 결코 패자에게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는 냉정한 진실을 이처럼 천연덕스럽게 속삭이는 대사가 또 있을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 나오는 대사 “말은 제대로 하자. 넌 노력하지 않아. 단지 징징대는 거야”보다 몇 곱절 더 싸늘하고 잔인하다.

하지만 영화에는 삶의 의욕을 뿌리째 꺾어놓는 나쁜 대사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위로와 희망을 주는 대사도 많다.

영국 최초 스키 국가대표 선수의 도전 실화를 옮긴 감동적인 영화 ‘독수리 에디’에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꼴등’ 선수 에디에게 세계 1위가 건네는 철학적인 대사가 나온다. “너와 나는 한 시와 열한 시 같아. 나머지 시간들보다 서로와 더욱 가깝지. 이기고 지는 건 중요하지 않아. 우리는 영혼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점프를 하지.” 얼마나 멋진 은유인가! 12시라는 최고의 자리를 이미 맛본 자신(1시)만큼이나 12시를 향해 달려가는 에디(11시)의 삶도 소중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니 말이다.

멜로물에 정통한 곽재용 감독이 뜻밖에 내놓은 스릴러 ‘시간이탈자’에도 사고뭉치 제자에게 스승이 건네는 명대사가 등장한다. 역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은유다.

“선생님, 저 양아치 맞거든요? 이제 그만 저를 포기하시라고요.”(제자) “허∼. 나침반 바늘이 움직이는 동안은 방향을 알 수 없는 법이지.”(스승) “예?”(제자) “네가 길을 잃어서 나침반을 꺼냈다고 생각해 봐. 그럼 방향을 찾으려고 나침반 바늘이 마구 움직이겠지? 그동안 너는 눈금을 읽을 수 있을까?”(스승) “당연히 없죠. 근데,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제자) “넌 지금 방향을 찾고 있는 거야, 인마! 네 나침반 바늘이 아직 움직이고 있는데, 남의 말이나 듣고 내가 널 판단해서야 쓰겠냐? 나침반 바늘이 움직이는 동안 난 너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기로 했다.”(스승) “그게 언제까지 움직일 줄 알고….”(제자) “교사의 본분은 가르치는 게 아니야. 기다려 주는 거지.”(스승)

아, 상대의 나침반 바늘이 움직이는 동안 기다려 주는 아량과 배려가 이 세상엔 이미 멸종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나를 믿고 기다려 주는 단 한 명만 세상에 있어도 제법 살맛이 날 터인데. 영화 ‘계춘할망’에서 할머니가 손녀에게 건네는 대사로 이번 칼럼을 마감할까 한다.

“세상살이가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온전한 내 편만 있으면 살아지는 게 인생이야. 내가 네 편 해줄 테니 너는 네 원대로 살거라.”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