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수 前 검찰총장
《제대로 임자를 만났다. 기자는 불문곡직 하수(下手)를 자처하며 두 점을 깔았다.
인터넷 바둑사이트 사이버오로에서 최고단(7단)에 플러스 알파격인 ‘별’까지 달았던 그를 두 점이 아니면 이기기 힘들다고 본 꼼수였다. 그러나 상수는 역시 상수.
중반 초입에 기자의 대마를 간단히 잡아버렸다. 기자는 꾸준히 상대 대마를 노렸으나 백은 이미 사는 수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돌을 던져도 이상하지 않을 형세에서 ‘던질 구실’을 찾기 위해 비비적거린 무리수가 통했다. 장장 1시간 반이 걸린 대국은 기자의 대역전극으로 막을 내렸다.》
●나의 한수○
<진광불휘>
진정한 빛은 번쩍거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번쩍거리고 싶은 것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 내면의 진심이 담겨 있지 않고 외부에 보이고 싶은 모습에만 신경 쓸 가능성이 높다. 특히 공직자가 새겼으면 하는 말이다.
젊을 때 등산을 매우 좋아했지만 이젠 무릎 탓에 접었고 바둑이 아직도 좋은 취미로 남아 있다. 옛 검찰 동료들과 서울 서초구 한일기원에서 만나 수담을 나누고 만둣국 한 그릇씩 먹으며 입담을 나누는 것이 아직도 즐겁다고 한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송광수 전 검찰총장(66·김앤장법률사무소 고문변호사)을 12일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2003년 총장 시절 그는 대검 중수부의 대선자금 수사를 6개월간 지휘했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물론 참여정부 실세와 노무현 대통령까지 도마에 오른 수사였다. 그는 이 수사를 ‘외길 수순’이라고 표현했다. “외길 수순은 고민할 게 없어요. 수읽기대로 두면 돼요. 옆에서 훈수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대국 중 TV에서 여고생과 성관계를 맺은 경관 사건 보도가 나오자 갑자기 “요즘 공직기강이 참 문제긴 해요”라고 불쑥 말을 던졌다. 공직자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금도(禁度)가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대국 후 전관예우 비리 등으로 구속된 홍만표 변호사 건에 대해 조심스럽게 의견을 구했다. 그는 직답 대신 좀 전에 둔 바둑 얘기를 꺼냈다. “아까 서 기자가 내 대마 잡으려고 했는데 대마가 사는 간단한 수를 못 본 거 같더라고. 서 기자 실력이면 쉽게 볼 수 있는 건데 대마 잡을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거죠. 그 사람도 수읽기가 셌을 텐데….”
그는 내친김에 전관예우 얘기를 꺼냈다. 2005년 검찰총장에서 퇴임한 그도 한때는 전관이었다. 개인사무실을 냈다가 2년 만에 접고 김앤장법률사무소로 들어왔다. “사경에 빠진 돌을 억지로 살리려고 하다 키워 죽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패망의 지름길이죠. 미련을 딱 버려야 해요. 안 되는 사건은 ‘안 된다’고 얘기하고 맡지 않는 게 전관 유혹에서 벗어나는 길이에요. 전관이라는 이유로 비(非)전관의 기회를 빼앗는 게 불공정한 거죠.”
“아버지가 고향으로 내려가자고 했어요. 바둑 두러 서울 왔느냐며. 싹싹 빌고 안 둔다고 해서 간신히 설득했지만 그 후로도 자주 뒀지요. 고3 때만 빼고요. 하하.”
그가 좋아하는 기사는 이창호 9단. 그의 기풍도 이 9단을 닮았다. 침착하고 안정적이지만 ‘한 칼’이 있는….
“이창호 9단이 요즘 성적을 못내 안타까워요. 건강 문제인 거 같은데…. 역시 하늘이 모든 걸 다 주진 않나 봅니다. 일찍 1인자가 된 대신 급격히 떨어진 걸 보면요. 그래도 다시 올라설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한때 서울 강서구 자원봉사 변호사를 했던 그는 지난해부턴 무료법률상담을 해주는 서울시 ‘마을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은퇴 후 계획도 비슷했다.
“돈 버는 데 큰 관심이 없는 변호사들, 연수원 막 나온 변호사들과 함께 조그만 사무실 차려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사건을 맡고 싶어요. ‘동네변호사 조들호’보다는 조금 문턱이 높겠지만 ‘실비’ 수준으로만 받을 겁니다.”
바둑으로 치면 딱 반집만 이기겠다는 소박하면서도 원대한 꿈 같았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