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이종석 기자
같은 해 가을,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이 열릴 무렵. 삼성은 TV에 내보낸 기업이미지 광고에서 일등을 강조한다. “1927년 최초의 대서양 횡단 비행, 찰스 린드버그”로 시작하는 광고 내레이션은 최초의 전화 발명(1876년)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인류 최초의 달 착륙(1969년) 닐 암스트롱까지 소개한 뒤 “역사는 일등만을 기억합니다”로 마무리된다. 이 해에 삼성 야구는 정규리그에서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5등(전체 8개팀)을 해 플레이오프에 나가지 못했다.
14일로 전반기를 마친 올 시즌 프로야구에서 ‘일등 주의’ 삼성의 대추락이 단연 화제다. 삼성은 전반기를 9등으로 마쳤다. 전반기 막판에는 꼴찌인 10등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한 시즌 80경기 이상 치른 시점에 삼성의 순위가 꼴등이었던 건 프로야구가 생기고 처음 있는 일이다. 삼성의 전반기 승률은 0.415다. 역대 단일 시즌 중 가장 낮았던 1996년의 팀 승률 0.448에도 못 미친다. 삼성은 작년까지 5년 내리 정규리그 1등을 했던 팀이다.
원인이야 뭐가 됐든 삼성의 부진이 특히 얘깃거리가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은 5년 연속 1위 팀이었다는 것.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던데 이렇게 한 방에 훅 갈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한 방에 가기도 한다. 그런 게 스포츠다. 일본 프로야구 최고 명문 구단 요미우리는 1965∼1973년 저팬시리즈에서 9년 연속 우승한 팀이다. 1974년에는 승수 차 없이 승률에서 주니치에 0.001이 뒤져 리그 2위를 했다. 그랬던 요미우리도 이듬해인 1975년 리그 꼴찌의 수모를 겪었다. 당시 요미우리의 시즌 승률은 지금의 삼성보다 못한 0.382였다. 미국 프로야구 뉴욕 양키스도 1960년대에 비슷한 경험이 있다.
삼성의 추락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만드는 게 ‘일등 주의’ 이미지다. 삼성이 8, 9등일 때만 해도 그렇게 대단한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러다 한화에 패하면서 꼴찌가 된 10일 삼성은 팬들에게는 안줏거리, 미디어에는 기삿거리가 됐다. ‘삼성이 꼴등을 다 하네…’ 하는 식으로. 삼성이 10등으로 떨어진 날 승률은 0.418이었다. 올 시즌 삼성은 9등일 때 이보다 승률이 더 낮았던 적이 있다. 순위는 한 단계 위였어도 절대 성적은 꼴등일 때보다 더 나빴다는 얘기다. 전반기를 9등으로 마친 지금도 10등일 때보다 승률은 더 떨어진다. 하지만 ‘일등 주의’ 삼성 앞에 꼴등 딱지가 붙었는데 승률이 높다 한들 그런 게 눈에 들어오겠나….
하지만 꼭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니다. 삼성은 한때 몸값 비싼 선수들을 줄줄이 영입해 ‘돈성’으로 불린 적이 있다. 그런 삼성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르기까지 20년의 시간이 걸렸다. 삼성은 프로야구 원년 구단 중 제일 늦은 2002년에야 한국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우승했다. 삼성 농구는 이미 3번의 꼴찌를 경험했다. 삼성 축구도 올 시즌 줄곧 하위권에 처져 있다. 삼성이 해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승부의 세계다. 그런 게 또 스포츠의 매력이다. 스포츠 세계에서는 꼴등 삼성을 꼭 낯설게만 볼 필요가 없는 이유다.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