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은영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
#은우(만 5세)는 오늘이 엄마가 장난감을 사주기로 약속한 날이다. 옷을 챙겨 입고 막 장난감을 사러 나가려는데, 엄마가 말한다. “아까 가지고 논 장난감들 치워. 장난감 정리 잘 안 하면 새 장난감은 안 사기로 약속했지?” 아이는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에 허둥지둥 장난감을 치운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다. 아이는 “갔다 와서 치우면 안 돼요?”라고 말한다. 엄마는 “무슨 소리야? 네가 약속 안 지키면 엄마도 약속 안 지켜.” 아이는 훌쩍이면서 장난감을 치운다.
나는 종종 “그놈의 약속”이라는 말을 한다. 약속은 지켜야 하고 아이한테 가르쳐야 하는 가치이기는 하나, 아이에게는 너무 어렵고 무거운 개념이다. 그런데 부모들은 자주 ‘약속의 힘’을 악용하여, 아이를 마음대로 다루고 통제하려는 면이 없지 않은 것 같다. 동생을 때렸어도, 장난감을 사 달라고 해도, 정리를 잘 안 해도, TV를 많이 봐도, 편식을 해도, 친구와 싸워도, 선생님 말씀을 잘 안 들어도, 숙제를 제때 안 해도 부모들은 “너 약속했잖아”를 들이댄다. 그러면 아이는 할 말이 없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너무 대전제이고 상위 가치이기 때문에 대항할 방법이 없다. 일순간 아이는 대역 죄인이 돼서 부모가 풀어놓는 비난을 다 들어야 하고, 무슨 벌이든 달게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은우 엄마도 ‘자기가 가지고 논 장난감은 자기가 정리해야 한다’를 가르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는 아이의 마음을 먼저 보고 약간의 유연성을 발휘해도 된다. “네가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은 네가 치워야 하는 것은 맞는데, 갔다 와서 꼭 치우자”고 하면 된다. 약속을 위해 약속을 한 것이 아니므로 그 순서는 좀 달라져도 된다. 그 순서를 꼭 엄마 마음대로 정할 필요는 없다. 아이가 약속을 어겼을 때는 약속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원래 가르치려고 했던 그것을 가르치면 된다.
사실 아이들은 부모의 무언의 압력으로 억지로 약속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꼭 지켜야겠다는 동기가 있어서, 지킬 자신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논리적인 생각을 갖기에는 아이는 아직 너무나 어리다. 그저 약속을 하지 않으면 혼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혹은 약속을 하면 부모가 그 상황만은 칭찬을 해주기 때문에 ‘멋모르고’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데 부모는 그렇게 얼렁뚱땅 한 약속을 어겼다고, 아이를 비난하고 협박하고 죄책감까지 준다. 그리고 당당히 아이를 통제한다. 약속을 못 지켰다는 것을 전제로 자꾸 타율로 가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아이의 자율성, 책임감, 자기 효능감, 자존감 등은 모두 떨어지게 된다. 벌이 두려워서 싫지만 억지로 지키게 될 때도 아이의 자율성, 책임감, 자존감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이때는 욕구 불만이 생기고 무력해지기까지 한다.
아이와의 약속은 지킬 수 있는 현실적인 기준으로 최소한만 정하되, 그것도 아이와 충분히 합의가 되어야 한다. 부모의 일방적인 지시가 ‘약속’의 형태가 되면 안 된다. 어겼을 때도 융통성을 좀 발휘해 줘야 한다. 약속은 부모가 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에게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은영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은영소아청소년클리닉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