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최희준의 하숙생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한국 사람이라면 대부분 다 아는 이 가사는 허무주의자의 독백, 혹은 패배자의 넋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 가사가 지독한 실존주의자의 혹독한 자기반성으로 들립니다. 똑같은 현상과 이야기를 놓고 해석이 전혀 달라질 수 있죠. 인간은 보고 싶거나 아는 것을 보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니까요. 뇌가 그렇게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왜 사는 것일까요. 과거에는 신이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줬습니다. 그러나 신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는 인간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자유로워졌는데, 의미를 창출하는 능력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행복의 필수적 전제 조건이라 믿었던 자유를 ‘나름’ 얻었는데 행복해지기는커녕 지루해지고 불안해지다가 허무해졌죠.
실존주의는, 제가 이해한 바로는, 삶의 의미는 원래 부여된 것이 아니니까, 너희는 ‘던져진 존재’니까 존재의 양식을 너희들이 결정해서 ‘실재로 존재’해 보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타고난 특성과 얻어진 관심에 의해 설정된 목적을 이루기 위한 현실적인 세상을 만들면서 사는 것처럼 살아 보라, ‘실존’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 심각한 제한점이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환상이나, 불행한 과거에서 비롯된 과도한 기대를 버리랍니다. 인간의 피할 수 없는 한계를 인식하면서, 또한 나라는 사람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직시하면서 내가 원하는 삶인 동시에 타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랍니다. 자신의 선택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오늘 죽을 사람같이 살랍니다.
빌어먹을, 정말 힘든 일입니다. 가르쳐 달라고, 이끌어 달라고 했는데 너희가 깨닫고, 너희가 능동적으로 윤리적인 선택을 하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죽을 듯이 노력하고, 그 결과를 너희가 책임지라는 것이죠.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자유는 원하지만 책임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철학은 이성적으로 가장 옳은 말을 한 후 급격하게 인기를 잃었죠. 철학자님들, 제가 잘못 파악했다면 죄송합니다. 더 심오한 의미가 있겠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하숙생의 2절 가사는 이렇습니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결국 부와 명예에 집착하지 말고, ‘무엇이 중헌디’를 잊지 말고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능동적으로 원하는 삶을 만들고 책임지자는 이야깁니다. 힘든 일입니다. 누가 이끌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