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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간 묻힌 ‘명예의 전당 헌액’… “요삼형이 시그널 보낸것 같아”

입력 | 2016-07-23 03:00:00

[토요일에 만난 사람]비운의 챔프 故 최요삼을 되살려낸 동생 최경호씨




서울 강남구 신사동 Y3복싱클럽에서 고 최요삼 선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최경호 대표. Y3복싱클럽 벽에 그의 형 최요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최 대표는 최요삼의 뒤를 잇는 세계챔피언 배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9년 전 크리스마스에 형은 쓰러졌다. 사람들이 축제를 벌이거나 선물을 주고받던 그날, 형은 경기에 나섰다. 생의 도전이 멈추게 될 줄 모른 채. 그 순간 동생이 곁에 있었다. 형의 이름을 빛내고 기억하기 위한 동생의 오랜 노력이 이어졌다. 형의 뜻을 이은 동생에 의해 형제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과거는 승화되어 새로운 의미를 남기고 있다.



2007년 12월 25일 서울에서 열린 세계복싱기구(WBO) 인터콘티넨털 플라이급 타이틀 매치에서 챔피언 최요삼은 마지막 12라운드 종료 10초를 남기고 도전자 헤리 아몰(인도네시아)의 펀치를 맞고 쓰러졌다. 최요삼은 일어섰다. 두 주먹을 들어올리며 경기를 계속할 뜻을 밝혔다. 주심은 경기 재개를 선언했고 종이 울려 경기가 끝났다. 하지만 최요삼은 경기가 끝나자 다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마치 경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투혼이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를 붙잡고 있었던 것처럼. 경기에서는 판정승했지만 그는 깨어나지 못했다. 한 차례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내려 온 뒤 다시 챔피언이 되기 위해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극한의 훈련을 계속했던 그였다. 최요삼은 2008년 1월 6명에게 장기기증을 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많은 국민을 울렸다. 한편으로는 장기기증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 최요삼이 세계복싱평의회(WB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사실이 국내에 뒤늦게 알려졌다. 최요삼은 WBO 챔피언이 되기 전 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에 올라 3차 방어에 성공했다. 한국 선수가 WB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것은 WBC 라이트 플라이급 15차 방어에 성공했던 장정구에 이어 두 번째다.

WBC에 따르면 최요삼이 명예의 전당에 입회한 것은 2009년이다. 그런데 왜 국내에는 이제야 알려졌을까.

최요삼이 WB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사실을 국내에서 처음 밝힌 사람은 최요삼의 친동생이자 매니저였던 최경호 Y3복싱클럽 대표(40)다. 그는 형이 쓰러질 당시 매니저로서 형의 곁에 있었다. 그는 어머니 오순이 씨(72)와 함께 형의 뇌사 판정을 받아들이고 사망에 동의하는 힘든 결정을 내려야 했었다.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요. 평소 WBC 홈페이지에 자주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왠지 들어가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명예의 전당 코너 초기 화면에는 형의 이름이 없었어요. 그렇지만 상세 검색을 해 보니 형이 이미 명예의 전당 회원으로 되어 있었어요. 정말 기뻤죠.”

WBC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최요삼에게 명예의 전당 회원 자격을 주었지만 관리 소홀로 정작 관련 사이트에는 그의 이름이 게재되지 않으면서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제가 알아내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누군가가 알아냈겠죠. 하지만 이 사실이 더 늦게 알려졌을 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내년쯤 아시아 지역에서 WBC 총회가 열리게 되면 형의 명예의 전당 입회 기념행사를 할 생각입니다. WBC 측에서도 총회 기간에는 언제든 기념행사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그는 갑자기 명예의 전당 관련 자료를 찾아보게 된 것에 대해 “형이 암시를 준 것 같다”고 말했다.

형이 죽은 후 복싱계를 떠났다가 복귀한 그는 “내가 복싱 관련 일을 다시 하게 된 것도 형의 영향 때문이었다. 사고 후 몇 년이 지났을 때인데, 꿈에 형이 나타나서 ‘너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래. 복싱 관련 일을 해라. 네가 갈 길은 복싱이다’라고 했다”고 말했다.

꿈에서 형의 말을 들은 그는 자다가 벌떡 일어났다고 했다. 형이 죽은 후 쇼핑몰 관련 회사에 다니던 그는 복싱계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꿈에서 형을 만난 후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고민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정말로 복싱 관련 일을 해야 하나. 침체기에 있는 복싱의 현실은 여전히 암울했어요. 반면 당시 직장에서는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고 있었지요. 현실에 안주해야 하나….”

부인이 큰아들을 낳고 둘째 아들을 임신했을 때였다. 그러나 결국 형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제 나이 30대 후반이었어요. 더 늦으면 다시는 제가 좋아했던 복싱 일을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심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눈에 밟히는 사람이 아내와 어머니였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그는 퇴직금 등으로 마련한 돈으로 아내에게 1년 치 생활비를 주고 난 뒤 복싱계에 뛰어들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한번 해보고 싶으니 이해해 달라”는 말과 함께.

“처자식이 나만 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수중에 돈도 없었어요. 하지만 마지막 도전이라고 생각했어요. 요삼이 형이 나를 보고 있다면 도와줄 것이라 믿었어요.”

그는 전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 플라이급 챔피언이었던 유명우 한국권투연맹(KBF) 실무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허락해 주신다면 같이 프로복싱을 위해 노력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유 부회장이 이끌던 버팔로프로모션에 합류해 본부장으로 일하게 된 그는 “별다른 월급은 받고 있지 않다. 하지만 제2의 유명우 장정구 최요삼을 키우려는 꿈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했다. 버팔로프로모션은 국제복싱연맹(IBF) 슈퍼밴텀급 아시아 챔피언인 김예준을 비롯해 국내 유망주들을 발굴해 육성하고 있다.

최 씨는 버팔로프로모션에서 복싱 관련 활동을 재개한 데 이어 많은 노력 끝에 2014년 12월 형의 이름을 딴 Y3복싱클럽을 개관했다. 요즘은 관원들에게 직접 스파링을 해주고 있다. 많을 때는 연이어 20명의 스파링을 해주기도 한다. 이런 날은 온몸이 녹초가 된다. 그럴 때면 땀범벅 속에서도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입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형 생각 때문이다.

“스파링 도중 맞으면서 생각합니다. 우리 형 이렇게 힘들었구나. 이렇게 힘들었을 텐데 왜 말리지 못했을까…. 형은 스파링 훈련을 할 때 아무리 힘들어도 ‘야 괜찮아 괜찮아 올라와’라고 했어요. 계속 링 위에 올라 자신과 스파링을 해달라고 했어요. 그 기억이 날 때면 ‘나도 여기서 한번 죽어보자’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스파링 대기자가 줄을 서 있어도 전부 올라오라고 합니다.”

2001년 1월 세계복싱평의회(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최요삼(오른쪽)이 서울 센트럴시티에서 도전자인 태국의 소르자투롱을 맞아 2차 방어전을 치르고 있다. 최요삼이 7회 KO승을 거두었다. 동아일보DB

생전의 최요삼은 쇼맨십도 강하고 화려한 이미지를 풍겼지만 그의 내면에도 고독과 두려움이 있었다. 그가 사경을 헤맬 때 공개된 그의 일기에는 “이제는 끝내고 싶다 권투를…. 맞는 게 두렵다”고 적혀 있었다. 1999년 WBC 챔피언에 올랐지만 경기 침체와 복싱 인기의 하락으로 인해 방어전 일정을 잡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며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일기에는 “나를 버리고 간 사람들이 생각난다. 권투도 나를 버릴까” “외로움이 너무나 무섭다. 너무나. 더 외로워야 할까”라는 구절도 있었다. “벼랑 끝 승부라고 생각하겠다. 나는 밀리면 죽는다”며 경기에 대한 각오와 절박함을 드러냈던 그였지만 “저 푸른 초원 위에 예쁜 집을 짓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장 평범하게 살고 싶다. 이제는 피 냄새가 싫다… 내일이 두렵다”고 적었었다. 35세로 사망한 최요삼은 미혼이었다.

최 씨는 “요즘도 형과 함께 차를 타고 다니며 듣던 음반을 가끔 듣는다. 가사가 참 슬픈 게 많다. 그때는 형에게 ‘왜 이렇게 슬픈 노래를 듣느냐’고 했지만 이제는 형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최 씨 자신도 삶이 힘들어 소주 한잔 마시고 혼자 눈물 흘릴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건 어쩌면 모든 가장(家長)들에게 공통된 게 아닐까. 링 위냐 링 밖이냐의 문제일 뿐 외롭고 치열하게 싸우는 건 모두 비슷할 거라고 본다”고 했다.

형은 그에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고 했다. “형님이 24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세 살 터울인 요삼이 형과 저는 6남매 중의 다섯째와 여섯째였어요. 어릴 때 형에게 맞은 기억이 많아요. 아버지 돌아가신 후 형과 더 친해졌지요.” 최요삼은 권투를 해서 번 돈으로 프로골퍼 지망생이었던 동생을 뒷바라지했다. “나는 (매)맞는 운동을 하지만 너는 좋은 운동을 해라”던 형이었다. 최요삼은 집안의 기둥이었다.

최요삼은 세계챔피언에 도전하기 위해 합숙훈련을 하면서 동생에게 매니저 역할을 부탁했다. 이후 형제는 링 안팎의 고락을 함께했다. 형이 “신발 좀 화려하게 만들어 봐라”고 하면 동생이 동대문시장에서 각종 재료를 구해 신발에 꿰매어 꾸미기도 했다. 옷감을 끊어다 경기에 입고 나갈 형의 옷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최요삼이 체력훈련과 체중 감량의 고통에 힘겨워하며 잠을 못 이룰 때면 함께 밤을 새웠던 동생이었다. 최 씨가 매니저 역할을 맡았지만 주요 결정은 최요삼이 많이 내렸다. “형은 갈까 말까 망설일 바에는 가는 게 낫다는 스타일이었어요. 형의 결정을 따르면서 저도 형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거 같습니다. 형은 오늘의 저를 만들어준 존재입니다.”

Y3복싱클럽은 서울에 3곳, 경남 김해에 1곳이 있다. 그는 “이 체육관 모두를 내가 출자해서 만든 건 아니다. 4곳 중 2곳은 같이 운동했던 후배들이 Y3라는 이름으로 체육관을 내고 싶다고 해서 개관한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Y3복싱클럽 본관 벽에는 최요삼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다. 그의 꿈은 Y3복싱클럽을 10개 정도로 확장해 전국에서 문을 여는 것이다. “저는 없어질 수 있지만 Y3복싱클럽은 계속 남았으면 합니다. 사람들이 저는 기억하지 못해도 요삼 형은 오랫동안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Y3복싱클럽이 활성화되면 자연스럽게 국내 복싱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결국 복싱 인구가 많아져야 복싱이 부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의 체육관에서 복싱을 익히는 사람들 중에는 의사 판사 등 엘리트 인사들도 많다고 했다. 최근 복싱클럽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다이어트와 건강증진 효과를 보려는 이들이 많다. 그는 “복싱이 더 이상 헝그리 스포츠로만 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최요삼이 떠난 이후 최요삼 추모 복싱대회를 2년 전까지 개최했다. 이제는 최요삼의 정신을 이어받은 선수들을 배출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는 ‘최요삼 정신’에 대해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을 이겨야 챔피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챔피언이 되기 위해 수백 km의 로드워크와 함께 혹독한 체력훈련을 했던 최요삼의 모습이 떠올랐다.

형의 죽음 이후 동생의 많은 활동은 형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생은 다시 형이 쓰러지던 그날을 회상했다.

“경기를 정리하고 형이 입원해 있던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뇌사’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속으로 ‘형 이렇게 가려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은 저를 강하게 키웠습니다. 그때 결심했습니다. ‘형 내가 멋있게 보내주고, 내가 살아 있는 한 형 이름이 영원히 남을 수 있게 그렇게 한번 해볼게’라고요. 내가 안 해도 누군가 그런 활동을 했겠지요. 하지만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존경하는 형이었기 때문에 형을 잊지 않고 살려는 것이 저의 마음이었습니다.” 최 씨는 덧붙였다. “언젠가 형을 만나겠지요. 사후세계에서든 꿈에서든. 이제는 형을 다시 만나도 떳떳할 거 같아요.”

이원홍 기자 blue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