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양형위원장 이진강
이진강 대법원 양형위원장은 2007년 출범한 양형위가 그동안 형사범죄 90%의 형량 기준을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복면 시위를 가중 처벌할 것인가를 놓고는 위원들 간에 의견이 팽팽히 맞서 결론이 쉽게 나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이진 논설위원
김영란법 개정 국민이 요구해야
―김영란법(부정 청탁 금지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때문에 농축산업인과 화훼업자, 유통업자가 아우성이고 정부 부처까지 금액 기준에 이의를 제기한다.
“현실에 맞지 않는 법을 만들어 놓으니까 그렇다. 식사 3만 원, 선물 5만 원, 경조사비 10만 원의 상한선만 해도 우리 현실을 모르는 거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부패상을 보면 이 법이 필요하지 않나.
―무슨 뜻인가.
“잘 알다시피 법에는 진흥과 규제의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이 둘이 잘 조화해야 좋은 법이고 사회에도 도움이 된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무한질주하면 큰 사고를 일으킬 위험이 있지만 반대로 계속 브레이크만 밟고 있거나 자주 밟으면 결국 파열된다. 김영란법은 브레이크를 계속 밟거나 너무 자주 밟는 자동차와 같다.”
―김영란법은 억제 위주라는 말인데….
“그래서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당초 국민권익위원회가 이 법을 정부안으로 만들 때는 공직자가 대상이었고 부정 청탁과 금품 수수 금지 외에 이해충돌 방지 조항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국회를 거치면서 사립학교 교직원과 언론인이 규제 대상으로 포함되고 국회의원은 부정 청탁의 범위를 크게 줄여 놓았다. 이해충돌 방지 조항도 사라졌다. 당초 취지에 맞지 않는 법이 돼 버렸다. 15개 금지 행위와 7개 허용 행위도 뭐가 뭔지 불명확하다.”
―헌법재판소가 사립학교 교사와 언론인을 포함시킨 것에 위헌 결정을 하면 되지 않을까.
“헌재가 그 부분을 한정위헌 정도로 결정을 하고 법은 큰 틀에서 괜찮다고 해도 그대로 시행할 수는 없다. 사회 모든 구성원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다 고려해야 할 법이기 때문에 결국 국회가 결자해지(結者解之) 차원에서 고쳐야 한다.”
―제 앞가림하기도 바쁜 여야가 개정에 나서겠나.
―모든 부패를 법으로 막을 수 있을까.
“논어 위정(爲政) 편에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통제하면 어떻게든 법망을 빠져나가 형벌만 면하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내용이 있다. 법률가인 나로서는 공감이 가는 말이다. 법이 능사가 아니다. 김영란법도 벌써부터 피해 갈 방법들이 거론되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사회에 신뢰가 있어야 할 텐데 진경준 검사장 구속을 보면 검찰부터 신뢰가 실종된 것 같다.
“검찰 선배로서 진경준 사건을 보면서 속으로 많이 울었다. 마음도 아프고 울화도 치밀어 오르고 그랬다. 능력은 있는데 인성이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비리와 범죄는 개인의 문제다. 그러나 국민을 위해서 써야 할 검사의 막강한 권한과 권력을 자신의 영달을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이용한 것은 개인적인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또 다른 문제는 뭔가.
검찰이 승진에 매몰돼 본분 잊었다
―검찰 문화가 왜 이렇게 됐다고 보나.
“정치권이 검찰을 너무 이용하려고만 해서 법이 정한 준(準)사법기관으로서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훼손하고 있다. 검찰 지휘부가 자기한테 영향을 주는 쪽에만 기웃거리다 보니 조직이 약화되고 기강이 무너졌다. 이게 가장 중요한 요인 같다. 검사 조직의 정점이라는 검찰총장의 위상에 검사들이 의구심을 가질 수 있는 현상이 벌어진다. 요새 일어나는 일들에 왜 자꾸 ‘저쪽’이 거론되나. 그게 바로 총장이 정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법무장관이 총장하고 협의해서 인사를 하게 돼 있는데 왜 ‘저기서’ 다 하는가 말이야.”
이 위원장은 ‘정치권’ ‘영향을 주는 쪽’ ‘저쪽’ ‘저기서’ 식으로 에둘러 표현했지만 청와대를 지칭한 것이다.
―법무장관이 감찰을 강화하고 검사들의 주식투자도 못 하게 하겠다고 했다.
“법무장관이 국민 앞에 사죄한 마당에 검사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려는지 파악해서 옳은 일이라면 내가 앞장서 도와줄 테니 같이 가자고 하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감찰한다, 개인적인 주식투자 금지한다, 이런 식으로 되는 게 아니다. 후배 검사들한테 ‘무신불립(無信不立) 의재정아(義在正我)’를 당부하고 싶다. 무신불립은 검찰이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면 설 수가 없다는 뜻으로 풀 수 있다. 검찰이 바로 서려면 신뢰를 되찾아야 한다. 그것도 검찰 스스로 해야 한다. 그래서 의재정아, 정의를 실현하려면 우선 자기부터 바르게 돼야 한다는 뜻이다. 고위공직자 비리 수사처(공수처)는 약간의 제어 기능을 할 수도 있겠지만 검사들이 생각과 행동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먼저다.”
―진경준 검사장의 비리를 키운 데는 우병우 민정수석비서관 책임이 크지 않나.
“동감이다. 진경준이 구속돼 검찰에 큰 타격을 준 가장 직접적인 요인은 검사장 승진 때 검증이 부실했고 문제가 발생한 뒤 신속하게 처리하지 못한 탓이다. 검증하면서 비리를 고의로 눈감아줬다면 정말 큰일 날 일이고 제대로 검증을 못 했다고 하면 역량의 문제다. 인사 검증의 허점이 진경준 때만 일어났나. 임기 말이 가까워 오는데도 ‘인사 부실’ ‘인사 참사’가 계속되고 있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참새가 들어왔다가 유리창에 두어 차례 부딪친 뒤 빠져나가는 것은 ‘시행착오’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계속 유리창에 부딪쳐서 결국 기진맥진해 죽는 참새가 있다. 이걸 심리학 용어로 ‘운동폭발’이라고 한다. 지금 이 정부의 인사는 시행착오의 정도를 훨씬 넘어 운동폭발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렇다 보니 공직 검증이고 뭐고 다 무너졌다. 빨리 바로잡아야 한다. 우 수석 문제의 핵심은 인사 검증을 제대로 못 했다는 점이다. 부동산 거래 의혹 같은 것들은 지엽적이다.”
―전관예우가 없었다면 홍만표 변호사가 떼돈을 벌 수 있었을까.
“내가 변호사를 하면서 실천했고 후배들에게도 당부하는 말이 있다. 판사는 공정한 것이 덕목이고 검사는 권한을 자제하는 것이 덕목이다. 변호사는 떳떳하고 따뜻해야 한다. 일한 만큼 상응한 보수를 받으라는 말이다. 돈을 너무 많이 받으면 비굴해진다.”
대통령 만기친람이 국정 맥 끊어
―시야를 법조계 밖으로 돌려도 전반적인 공직 기강이 해이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교육부 고위 관리라는 사람의 발언을 전해 들으면서 공직 기강이 이렇게 무너져 있구나 하고 걱정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임기 말의 레임덕(권력 누수) 현상이 아니고 벌써 몇 년 전부터 보였다.”
―이 정부 들어서 그랬다는 말인가.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장관 등 윗사람들이 만기친람(萬機親覽)식으로 자기가 앞장서 모든 걸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아닌가. 실제로 그렇게 행동해 온 것이 공직사회의 분야별, 단계별 힘을 빼는 중요한 요인이다. 경제와 안보, 경찰 등 부문별로 수장과 전문가들이 있다. 그리고 장관 밑에 차관 그 밑에 고위공무원 과장의 단계가 있지 않나. 단계별 책임자들에게 리더의 역할이 있다. 그 사람들이 권한과 책임을 갖고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위에서 다 가져가면 밑의 사람들이 할 일이 없어지고 일을 안 해도 된다. 그러면 맥이 다 끊어지고 힘도 약해진다. 어디 한 군데서만 그래도 문제가 되는데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로 끊어지지 않나. 삼국지에 사마의가 오장원에서 맞선 제갈공명이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 자고 곤장 이십 대 이상은 모두 직접 결재한다는 말을 듣고 빙긋이 웃는 대목이 나온다. 사마의는 군사(軍師), 즉 전략가인 공명이 일선에 나와서까지 지휘하는 걸 알고 체계가 안 서 있다고 판단해 승리를 낙관한다. 옛 소설 속 전쟁 이야기지만 우리 관료사회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단계별로 공직자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면 자기 일할 겨를도 없는데 어디 가서 폼 잡고 헛소리하고 다니겠나.”
이 위원장은 검사들이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점이 희망적이라고 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자라투스트라를 통해 말한 ‘몰락’처럼 검찰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그것을 새로운 시작을 위한 것이라고 새겼으면 한다.” 검찰이 뼈아픈 자성 후 환골탈태(換骨奪胎)의 실천을 해 나가면 국민을 위해 일하는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말에 절실함이 담겨 있었다.
이진 논설위원 lee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