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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서영아]‘인간 아키히토’에 대한 단상

입력 | 2016-07-25 03:00:00


서영아 도쿄 특파원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생전 퇴위’ 뜻을 비쳤다는 소식으로 일본 열도는 지난주 내내 들썩였다. 1989년 즉위한 아키히토 일왕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좋은 기억이 있다. 2004년 가을 일본 연수 중에 보게 된 뉴스의 한 장면 때문이다. 왕실이 매년 봄가을 주최하는 원유회(가든파티)에서 도쿄도교육위원인 요네나가 구니오(米長邦雄) 씨가 “일본 전국 학교에서 국기를 게양하고 국가를 제창하게 하는 게 제 임무”라고 자랑스레 말하자 일왕은 “강제로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당황한 요네나가 씨는 “그럼요, 훌륭한 말씀 감사합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일본 국가 ‘기미가요’는 ‘천황의 시대가 영원할 것’을 기리는 내용이다.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교육 현장에서는 사실상 금기시되다 1999년 국기국가법이 제정된 후 국가 제창을 강요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도쿄도교육위원회는 2003년 국가를 부를 때 기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직원을 징계 처분하는 등 우경화의 선봉에 섰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강제로 하지 않는 게 좋다’는 일왕의 발언은 당시 일본 내에서 미묘한 파장을 낳았다. 우경화 흐름에 반(反)하는 발언이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아온 전후(戰後)의 전통에도 어긋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논조로 알려진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정치적인 화제를 끄집어낸 요네나가 씨가 문제”라며 “천황이 그 자리에서 그저 ‘수고 많다’는 인사로 대화를 끝냈다면 우파에서는 천황의 승인을 얻었다고 주장할 테니 이를 막기 위한 발언이었다”고 썼다.

일왕은 아사히신문 애독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어느 모로 보나 최근 일본의 보수우경화의 흐름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운신 폭이 크지 않지만 그의 메시지에는 전쟁에 대한 반성과 평화를 지향하는 노력이 담겨 있다.

지난해 전후 70년을 맞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모호한’ 사죄 담화를 내놓은 것에 비해 그는 ‘깊은 반성’을 언급했다. 사이판, 팔라우, 필리핀 등 태평양전쟁 피해지를 노구(老軀)를 이끌고 찾아다니며 전몰자 위령의 행보를 이어왔다. 올해 구마모토 지진 피해지를 방문할 때 보도된 것처럼 이재민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손을 맞잡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역사연구가인 한도 가즈토시(半藤一利)는 “‘천황은 국민통합의 상징’이라는 헌법 1조와 ‘전쟁 포기’를 규정한 9조를 동시에 구현하기 위해 평생 애써 왔다”고 말했다.

생전 퇴위 의향이 보도된 후 일본에서는 그의 의중에 대해 백가쟁명(百家爭鳴)식 해석이 나온다. 그가 일본의 국왕이 어떤 존재인지 재점검하길 원한다는 해석이 많은 반면, 상징적 존재에 불과한 일왕이 왕실전범(왕실 제도와 구성 등을 정한 전범) 개정이 필요한 퇴위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호헌파인 천황이 헌법 개정 논의를 막기 위해 왕실전범 개정 논의를 끄집어냈다’는 말까지 들린다. 실제로 일본 사회의 관심사는 개헌에서 왕실로 급격히 옮아갔고, 헌법 개정 안건을 논의할 예정이던 가을 국회 헌법심사회에서 왕실전범 개정 문제도 함께 다뤄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어느 경우든 한계 속에서도 자신에게 부여된 소명을 다하기 위해 애쓰는 ‘인간 아키히토’의 진정성은 제대로 알아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일왕은 한국 방문을 원했고 한국에 대해 여러 차례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하지만 역사의 응어리가 워낙 큰 한일관계에서 그런 날이 쉽게 다가올 것 같지는 않다. 그가 퇴위를 거론했다는 소식에 가장 먼저 그 아쉬움이 떠올랐다.
 
서영아 도쿄 특파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