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우리 도서의 장정은 주로 화가들이 맡았다. 김용준, 정현웅, 김환기, 김기창, 길진섭, 장욱진, 구본웅, 남관, 박서보, 박고석, 이응노, 윤명로, 천경자. 이 밖에도 많은 화가들이 참여했으며 김용환, 김영주, 이승만, 김세종 등 삽화가들, 김충현, 김응현, 손재형 등 서예가들도 솜씨를 보탰다.
최남선이 우리나라 역대 문헌에 실린 시조를 모아 1928년에 펴낸 ‘시조유취(時調類聚)’의 표지는 위창 오세창의 조카인 동양화가 오일영의 작품이다. 제목 글자, 즉 제자(題字)는 3·1운동 당시 조선 독립에 관한 의견서와 선언서 등을 도쿄 현지에서 일본 정부 측에 발송한 임규(1867∼1948)의 글씨다. 최남선은 임규의 일본인 아내의 안방에서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이 책의 장정에는 위당 정인보와 1세대 유화가 김찬영도 참여했다.
역사학자 두계 이병도의 ‘내가 본 어제와 오늘’(1966년)의 표지 도안은 장욱진, 제자는 서예가 월담 이동용의 작품이다. 장욱진의 아내로 두계의 맏딸인 이순경이 서울 혜화동에서 운영하던 서점 동양서림은 주인은 바뀌었지만 지금도 영업 중이다. 화가 김환기는 아내 김향안의 수상집 ‘파리’(1962년)의 장정을 맡았고, 소설가 박태원의 ‘천변풍경’(1947년)의 장정가는 그의 동생 박문원이었다.
문학, 회화, 서예, 사진, 삽화 등 다양한 예술 장르들이 단행본에서 융합적인 성과를 내던 시절이다. 분야가 한층 세분화, 전문화되면서 칸막이도 높아진 요즘과 다르다. 오래된 책 표지들은 당대 문예계의 교류 네트워크를 증언하는 자료이자 오늘날 새삼 강조되는 영역 간 융합이라는 ‘오래된 미래’의 흔적이다.
표정훈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