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영화 ‘부산행’은 인간애와 가족애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이승재 기자
Q. ‘부산행’의 좀비는 멍한 표정으로 걸어 다니는 할리우드 영화의 좀비들과 다릅니다. 무척 빠르고 힘도 세지요. 비현실적인 설정 아닌가요.
A. 좀비는 느려 터져야 정상입니다. 좀비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지요. 좀비는 아이티의 부두교에서 나왔습니다. 독성약물을 통해 사람을 일시적인 가사(假死) 상태로 만든 뒤 다시 살려낸 존재를 좀비라 일컬었지요. 의식이 없고 몸만 움직이는 좀비들은 노예처럼 노동 착취에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좀비는 원래 ‘피해자’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열정 페이’에 희생되는 아르바이트생, 혹은 염전 노예에 가까운 개념이었지요. 딱히 상냥하진 않지만 결코 남을 공격하거나 물어뜯지 않고, 먹지도 자지도 않고, 월요일 출근길 직장인처럼 영혼 없이 흐늘흐늘 걷는 모습이 ‘좀비 본색’이지요.
이윽고 브래드 피트가 나오는 ‘월드워Z’(2013년)에 이르면 무슨 레고 블록처럼 자기네들끼리 떼로 뭉쳐 담을 넘거나 공중에 뜬 헬리콥터를 공격하지요. 북한의 매스게임 저리 가라 할 정도의 협동정신과 집단지능을 구비하게 된 겁니다. ‘부산행’에서 주인공 일행이 탄 기관차를 좀비들이 구름처럼 뭉친 채 서로가 서로를 디딤판 삼아 뛰어넘으며 쫓는 끔찍한 순간은 바로 이런 장면에서 착안한 아이디어로 생각됩니다.
Q. 쫓고 쫓기는 게 전부인 좀비영화에 이토록 많은 한국인이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요? 너무 단순한 이야기인데….
A. 단지 좀비들이 판을 치는 영화였다면 ‘부산행’은 한국인의 마음을 잡지 못했을 겁니다. 이 영화는 좀비의 외피를 둘렀지만 종국엔 인간애와 가족애를 말하는 휴먼드라마이지요. 자식을 위해 몸을 던지는 아버지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좀비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면서 서로를 의심하고 배신하는, 좀비보다 100배 더 ‘비인간적’인 인간 존재의 본질도 우리는 목격하게 됩니다.
초고속열차인 KTX를 공간배경으로 한다는 점과 ‘부산행’이라는 제목이야말로 이 영화의 탁월한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합니다. 속도의 상징인 KTX를 좀비와 투쟁하는 핏빛 밀폐공간으로 삼음으로써 ‘빨리빨리’를 모토로 고속 성장해온 한국이 봉착한 난감한 현실이 포개어지지요. ‘부산행’의 ‘행(行)’ 또한 절묘한 단어 선택입니다. 주인공 일행은 좀비들로부터 안전하다고 알려진 부산을 향하지만, 결국 부산이 안전하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지요. 좌고우면하지 않고 외길로 달려가 목표를 성취한다 해도 우리는 언제까지나 ‘생존’의 문제로부터 해방될 수 없음을 빗대어 말해주고 있지요.
좀비, 멀리 있지 않습니다. 80% 세일 들어간 명품 핸드백을 손에 넣기 위해 매장으로 돌진하는 아주머니도, 술만 먹으면 개로 변해 아내도 딸도 몰라보고 거실장을 뒤엎는 아파트 윗집 아저씨도, 자신의 꿈도 진로도 알지 못한 채 오후 10시만 되면 학원에서 쏟아져 나오는 고등학생들도, 정치인의 장밋빛 약속을 믿고 우르르 표를 준 뒤 후회막급인 저를 포함한 유권자들도 알고 보면 ‘좀비’입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