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그날 낮 크루즈가 야외무대에 섰을 때는 도널드 트럼프 전용기가 굉음을 내며 착륙했다. 연설이 끊겼고, 크루즈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조연의 운명은 그런 거였다.
“내 아내를 욕한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말과 함께 크루즈는 그렇게 지지자의 표심을 걷어갔다.
토너먼트 방식인 미국 대선은 선택의 연속이다. 결정이 내려지면 변수가 상수가 되고, 관심은 떠나간다. 크루즈 지지자와 샌더스 지지자에게 두 후보가 공들이는 것도 그런 이유다.
2주간의 전당대회 현장 취재에서 확인한 건 ‘앙금’이었다. 11월 8일 본선까지 100일의 시간이 있지만 화학적 결합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패자가 승복하지 않는 건 승자 지지가 불의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클린턴은 여전히 의혹 덩어리였고, 트럼프는 거짓말쟁이 폭군이었다.
트럼프는 당 지도부의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딸 이방카를 들러리로 세우고 원맨쇼를 해야 했다. 코앞에서 본 이방카는 여신이었다. 트럼프 가족이 ‘우성 유전자’를 과시한 무대라는 평도 있지만 클린턴-오바마-샌더스 삼각편대에는 힘이 부쳤다.
‘8년 임기 중 최고였다’는 평을 받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에도 역설은 있었다. 오바마의 품에 안겨 지그시 눈을 감던 클린턴. 하지만 지지율은 오바마만 올랐다. 현직 대통령만 못하단 평을 듣는 클린턴에게 오바마는 신부보다 화려하게 치장한 ‘민폐 하객’이 아니었을까.
주변에선 말한다. TV로 본 전당대회가 대단한 축제였다고. 쟁쟁한 정치인들과 유명 배우, 가수들이 등장했으니 그럴 법하다. 하지만 잔칫상 뒤에서 가족끼리 드잡이하는 잔상이 남아서인지 밥 얻어먹고 소화 안 되는 기분이었다. 1년 뒤 한국에서 벌어질 수도 있을 법한 찜찜한 축제였다.
박정훈 워싱턴 특파원 sunshad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