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칼라 범죄 ‘솜방망이 양형’] 양형기준 도입 7년 뇌물범죄 기준 未준수 매년 늘어… 1억 부당이득 회계사 ‘반토막 형량’ 판사 재량이라지만… “지도층 봐주기, 판결 신뢰 훼손… 양형기준도 현실 맞게 재조정을”
#2. 공인회계사 이모 씨(32)는 지난해 1월 회계감사에 참여 중인 동료 회계사들에게서 미리 모 기업의 실적 정보를 입수했다. 영업실적이 공개되면 주가가 변동할 것이라 예상한 이 씨는 직접 주식을 미리 사들이거나 매도 포지션을 취하고 지인들에게도 정보를 알려줘 총 1억2000여만 원의 부당 이득을 취득하거나 취득하게 했다.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재판을 받은 이 씨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이 씨가 자신의 잘못을 깊이 인정하고 범행 기간이 비교적 짧다는 점 등을 이유로 권고 최저형(1년)보다 낮은 형을 선고한 것이다.
대법원의 ‘양형 기준 제도 시행 이후 연도별 준수율 현황’에 따르면 미준수율이 20%를 넘어선 범죄 유형은 뇌물(22.1%), 증권·금융(21.8%), 선거(22.0%), 지식재산(20.5%), 변호사법 위반(23.1%), 성매매(21.2%), 식품·보건(23.6%), 약취·유인·인신매매(28.6%) 등 8개 유형으로 나타났다. 이 중 뇌물, 증권·금융, 선거, 지식재산 범죄 등 다수는 주로 사회 지도층이나 고학력자들에 의한 ‘화이트칼라 범죄’로 불린다. 특히 뇌물 범죄는 2013년(18.1%)부터 2015년까지 양형 기준을 지키지 않는 비율이 점차 높아지는 추세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양형 기준 제도의 취지에 대해 양형의 균등성과 적정성을 높이고 ‘고무줄 양형’이나 ‘불공정 양형’을 줄여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증진하는 것이라고 밝혀 왔다. 하지만 뇌물, 증권·금융 등 화이트칼라 범죄에서는 양형 기준 미준수율이 여전히 평균치를 크게 웃도는 상황은 양형 기준과 실제 판결 간의 괴리가 여전하다는 점을 보여 준다.
양형 기준이 모든 사례에 예외 없이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건마다 서로 다른 양형 인자나 참작 사유를 반영하는 건 판사의 재량권 범위에 속한다. 다만 양형 기준을 벗어난 사건이 지나치게 많아질 경우 양형 기준 제도를 도입한 취지를 해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작지 않다.
일부 화이트칼라 범죄에서 여러 감경 요인이 고려되는 이유로는 복잡한 범죄 특성상 혐의를 입증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한계도 작용한다. 범죄 사실이 명확하고 입증하기 쉬운 일반 범죄에 비해 화이트칼라 범죄는 제대로 된 증거가 부족해 입증이 어려운 경우도 많다. 또 ‘금전적 피해 보상’이나 ‘피해자와의 합의 여부’ 등 감경 요인에 대한 재판부의 재량권 행사범위가 각자 다른 점도 미준수율이 높은 원인으로 꼽힌다.
대법원 양형위 관계자는 “일부 범죄 유형의 준수율이 80%대로 다른 범죄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80%가 결코 낮다고는 할 수 없다”라며 “특히 뇌물 범죄는 사회 정서를 반영하고 법정형 자체가 높다 보니 다른 범죄에 비해 기준이 엄격하게 설정됐다”라고 설명했다. 대법원 양형위 측은 현재까지 미준수율이 높은 범죄 유형에 대해 특별한 원인 분석이나 대안을 논의한 바는 없다고 밝혔다.
강동욱 동국대 법학과 교수는 “화이트칼라 범죄는 범죄 실체가 명확한 일반 사범에 비해 범죄 입증이 어려워 재판부에서 여러 감경 요소를 더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라며 “사회 상황이 변화된 만큼 양형 기준도 현실에 맞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권오혁 hyuk@donga.com·허동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