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13> 여수 적량동 고인돌 발굴 이영문 목포대 교수
이영문 목포대 교수가 7월 20일 전남 여수시 GS칼텍스 정유공장 내에 보존된 고인돌 2기 앞에서 발굴 당시를 설명하고 있다. 고인돌 무게는 각각 90t에 이른다. 여수=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이들을 직접 발굴한 이영문 목포대 교수(63)는 오랜만에 만난 자식을 대하듯 고인돌 곳곳을 살피고 어루만졌다. 그는 “반경 500m 안에서 고인돌이 300기나 나왔는데 이 2기는 다른 것들보다 5∼10배나 컸다”며 “너무 거대해서 다른 고인돌처럼 외부로 옮기지 못하고 결국 공장 안에 남겼다”고 말했다. 그는 고인돌을 바라보며 27년 전 기억을 하나씩 되살렸다.
○ 온전한 형태의 비파형동검 첫 출토
2009년 전남 여수시 월내동 고인돌 유적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들. 동북아지석묘연구소 제공
“동검? 자네 잘못 본 거 아닌가?”
“3년 전 주암댐에서 나온 것처럼 홈이 파여 있습니다.”
“뭐라고? 당장 그리로 가겠네.”
1989년 1월 18일 여수 적량동 호남정유(현 GS칼텍스) 공사 현장. 사업부지 확장 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고인돌 25기를 조사하던 도중 이영문은 제자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대어가 걸린 느낌에 그는 서둘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붓과 꽃삽을 잡고 조심스레 유물을 노출시키자 비파형동검(銅劍)과 비파형동모(銅모·청동투겁창) 조각들이 보였다. 발굴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여수반도에서 동검과 동모가 처음 출토된 순간이었다.
완형의 동검이 나온 고인돌(7호)은 보존 상태도 좋았다. 당시 덮개돌과 고임돌 6개가 온전히 남아 있었다. 덮개돌을 걷어내자 작은 돌들로 채워진 지하석실이 있었고, 돌무지 아래서 동검이 나왔다. 다음은 이영문의 회고.
“경험상 석실 깊은 데에서 나오는 동검은 오히려 보존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7호 고인돌 동검은 불과 지표로부터 20cm 아래에서 출토됐는데 상태가 훌륭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발굴한 것 중 최고로 치는 유물이죠.”
○ 팠다 하면 비파형동검 우수수…국내서 가장 많이 발굴
고고학계에서 이영문은 비파형동검 발굴의 1인자로 통한다. 그의 손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만 지금까지 총 18점에 이른다. 전국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40여 점)의 절반에 육박하는 숫자다. 내로라하는 고고학자들이 여수반도 고인돌에서 동검을 찾아 헤맸지만 오직 그만이 이런 성과를 거두었다.
“고향인 화순 벽송리 마을에 고인돌들이 있어요. 어릴 때 선산을 오가면서 친척들이 ‘이게 뭔데 여기 있느냐’며 궁금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는 그게 고인돌인 줄도 몰랐죠. 나중에 대학에서 수업을 듣고서야 고인돌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후 그의 인생은 확 바뀌었다. 전남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1979년 해남 북평종합고 교사로 발령받았지만, 한 달 만에 사직서를 내고 전남대 박물관에 들어갔다. 고인돌 발굴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기 위해 안정적인 교직까지 버린 것이다.
고고학계는 그가 발굴한 비파형동검이 중국 랴오둥(遼東) 지방에서 북한을 거쳐 남해안 일대까지 이어지는 동북아 문명교류의 양상을 보여주는 핵심 자료라고 평가한다. 특히 고인돌에서는 세형동검만 출토되는 것으로 알려진 기존 학설을 깰 수 있었다.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를 묻자 그는 “청동기시대 당시 여수 일대에서 고인돌을 쌓은 집단들의 생활유적을 찾는 것”이라고 답했다. “다양한 비파형동검들이 모두 외부에서 전래됐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이것들을 여수에서 직접 제작했던 장소가 분명 어딘가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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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