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터 칼로 연필을 아주 잘 깎는 맏딸과 언니로 성장해 갔다. 그러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몰라도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나는 방에 혼자 남겨지게 되었다. 그 후 5년 동안. 친구들과 동생들은 대학에 가고 취직을 하면서 모두들 눈부시게 아름다운 나비들로 변해 먼 데로 날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방문 밖의 모든 것과 담을 쌓아가면서 먹고 마시고 책을 읽는 데만 몰두해 있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책상에 연필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지금까지 본 연필들 중 가장 뾰족하고 검고 긴 심을 갖고 있는 연필 같았다. 그때의 내 무기력과 소외감을 푹 찔러 터뜨리고도 남을 만큼.
그날 밤에 그 연필을 손에 쥐고 처음으로 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내가 쓰는 연필에는 이런 두 가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매일매일의 노력’, ‘한 걸음 한 걸음 전진’. 연필을 갖고 한 일 중에 돌아보니 후회스러운 일도 떠오른다. 초등학교 때 마음에 안 드는 남학생이 짝이 되면 나는 가차 없이 연필로 책상 한가운데 금을 쭉 긋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선 넘어오지 마.”
오랫동안 연필을 쥐고 있다가 나는 결국 쓰는 사람이 되었다. 사람과 사람, 이곳과 저곳 사이, 보이지 않는 많은 선들을 지워가는 그런 글을 언젠간 쓸 수도 있게 되겠지라고 느긋하게 생각한다. 꿈을 연필로 써나가는 일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