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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용의 다른 경제]‘AIIB 참사’ 막을 수도 있었다

입력 | 2016-08-03 03:00:00


홍수용 논설위원

정부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고위직에 한국인이 선임되도록 노력 중이라고 한다. 홍기택 리스크 담당 부총재(CRO)가 취임 4개월 만에 사실상 쫓겨난 뒤 가만있을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인물이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다.

‘배신자 홍기택’ 당해도 싸다?

유일호와 기재부는 친박(친박근혜)인 홍기택과 거리를 두는 보도해명 자료들을 쏟아냈다. ‘홍기택의 휴직과 관련해 중국에서 통보받은 바 없음’ ‘휴직을 사전 협의하거나 권고한 적이 없음’ ‘휴직은 일신상 사유로 신청한 것임’…. 죽은 정승은 돌아보지 않는 정치의 속성으로만 보기엔 ‘마피아’ 관료와 그 집단의 행보가 이례적이다. 숨기고 싶은 커다란 무언가가 커튼 뒤에 있다.

기재부가 뿌린 이 퍼즐의 조각들을 맞춰보면 추악한 괴물 하나가 튀어 나온다. 괴물의 모습은 이렇다.

중국의 진리췬(金立群) AIIB 총재는 애초 프랑스 같은 유럽 주요 국가에 부총재 자리를 주고 외교적으로 도움이 되는 거래를 할 요량이었다.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 홍기택은 눈엣가시였다. 6월 15일 감사원이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부실 관리 책임자로 홍기택을 지목한 것은 진리췬에게 좋은 구실을 줬다. 진리췬은 홍기택에게 리스크 관리 총책을 맡기에 부적절하다며 사임이나 휴직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했다. 시한은 사흘 정도였다.

홍기택은 중국에서 기재부에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할지 물었다. 기재부 고위 관료의 답변은 “그런 건 당신이 알아서 해야지 왜 나한테 물어보나”였다. 이 관료가 유일호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답변의 뉘앙스에서 “부실기업 대우조선해양 지원은 전적으로 서별관회의 결정”이라고 폭로한 6월 초 인터뷰 때문에 배신자로 찍힌 홍기택의 입지가 읽힌다.

혼자 끙끙 앓던 홍기택은 사임보다는 휴직이 낫다고 판단해 진리췬에게 보고했다. 사실 별 차이도 없다. 휴직 사실이 공개되면서 기재부가 어쩔 수 없이 개입했지만 늦었다.

홍기택이 기재부에 전화 보고를 한 시점부터 길게는 사흘, 짧게는 하루 정도가 사태 수습이 가능한 골든타임이었다. 유일호가 곧바로 중국의 재무 또는 외교라인과 긴급 콘퍼런스콜을 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리스크 담당 부총재는 한국 몫이다. 부총재를 교체할 필요가 있다면 한국과 먼저 상의해야 한다”고 설득했다면 말이다.

홍기택 퇴출은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에 대한 중국의 우회적인 보복으로 볼 여지도 있다. 기재부는 중대한 경제외교의 기로에서 홍기택 개인에게 결정을 떠넘겼다. 지금은 언론 보도에서 틀린 조각을 찾아 해명 자료를 만들며 책임 회피 중이다. 정부는 홍기택에게 들었으니 중국이 우리 정부에 사전 통보한 것이 아니고, ‘홍기택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했으니 정부가 그에게 휴직을 권고한 적도 없는 것이 된다. 한국과 국제기구를 연결하는 끈이 떨어질 판에 누구를 보호하려 그리 애를 쓴 것인가.

국익보다 의리가 더 중한가

AIIB 참사는 낙하산 인사의 폐해를 보여줬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정피아 관피아 집단에 충성하는 인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계파주의, 계파 이익을 때로 국가 이익보다 앞세우는 패거리 정치문화 등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이 이 사태에 모조리 투영돼 있다.

홍기택을 처벌하면 한 폴리페서의 종말을 보겠지만 그것만으로 사과의 썩은 부분을 모두 도려낼 수는 없다. 지난달 홍기택의 보고를 묵살한 고위 관료가 누구인지 밝혀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그들만의 리그’를 용인하는 것이 된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