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신문 전 주필 도쿄 추도식에서
허문명 논설위원
와카미야 요시부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은 일반인들에겐 생소하지만 한일 언론인들에겐 익숙한 이름이다. 그와의 인연은 3년 전 오피니언팀장으로 그의 칼럼을 싣는 편집자로서 맺었다. 같은 업(業)에 종사하는 한 사람으로서 고인의 투철한 저널리스트적 사명감과 안목, 용기에 매료됐다.
그가 베이징에서 유명을 달리한 게 4월 말이니 석 달이 지났다. 지난달 29일 아사히신문사 주최로 마련된 추도식장은 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볐다. 동료 선후배들은 물론이고 전직 총리 등 일본 정관계 주요 인사에 한국에서 날아온 전직 주일 대사들과 언론인까지 섞인 행사장은 또 다른 뜨거운 한일 교류의 현장이었다. 하늘나라에서 “나야말로 가장 행복했던 저널리스트였다”고 말하는 고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얀 국화꽃에 둘러싸인 환한 웃음의 영정 사진을 보고 있자니 인생무상이 주는 허무감이 사라졌다. 몸은 비록 가고 없지만 그의 영혼이 뿌리고 간 씨앗이 한국과 일본의 단단한 우정으로 꽃피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담화의 주인공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은 추도사에서 “고인처럼 두 번이나 한국에 유학을 하면서 한글로 강의할 정도로 한국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고인은 단순한 ‘지한파’가 아니었다. 아베 내각의 군국주의 부활을 일관되게 반대했으며 전시(戰時) 일본 언론들이 “전리품을 더 따내라”며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 결국 ‘한국병합’이나 ‘대륙침공’에 탄력을 주었다면서,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부끄러워했던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일본 극우들은 매일같이 신문사 앞에 가두 선전차를 세워놓고 “국적(國賊)” “매국노”라 외쳐댔고 ‘와카미야는 할복하라’란 단체까지 생기는 바람에 고인 집 앞에 경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이렇게 위험한 삶을 살았지만 그는 수줍음이 많고 겸손했으며 유머가 가득했다. 43년간 일했던 직장에서 은퇴한 후에도 배낭 하나 메고 서울 도쿄 베이징을 오가며 취재수첩을 놓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기 3일 전 “서울에서 곧 다시 만나자”며 헤어졌던 저녁 자리가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그가 묵었던 베이징 호텔 책상에는 다음 날 발표할 원고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생애 마지막이 되어 버린 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일중한(日中韓)이 대립하거나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지만 나는 거기에만 눈길을 주지 않고 ‘유대’에도 눈길을 주고 있다. 환경문제를 시작으로 북핵문제 등 공통의 고민도 많다… 3국 사이에 국적을 초월한 신문을 만드는 꿈을 꾸고 있다.”
북한 미사일이 일본 코앞에 떨어진 그제, 그의 꿈이 단지 꿈으로만 끝나지 않게 일본의 양심적 저널리스트들과 함께 동북아 평화를 위해 고인이 걸었던 길을 이어받아야겠다고 감히 다짐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