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O 2016 ‘10-10’ 노리는 한국]
이런 종목이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에는 사이클, 이탈리아에는 펜싱, 헝가리에는 근대5종과 카누가 한국의 양궁과 같은 효자종목이다. 효자 종목은 대부분 해당 국가에서의 큰 인기를 배경으로 한다. 운동 능력이 뛰어난 어린 선수들이 인기 종목으로 진로를 선택하면서 그 종목에서 세계적인 강국이 되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네덜란드가 스케이팅 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인구가 약 1700만 명인 네덜란드는 국토의 25%가 해수면보다 낮아 전통적으로 운하와 수로가 발달했다. 이 때문에 겨울철 빙판을 활용한 스케이팅이 일찍부터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스케이트를 타고 출퇴근하는 장면도 낯설지 않다.
하지만 인기가 많다고 국제대회 경쟁력이 높은 것은 아니다. 멀리 볼 것도 없다. 국내에서는 철저히 비인기 종목인 한국 양궁부터 그렇다. 10억 명 가까운 인구가 자전거를 타는 중국도 아직 올림픽 사이클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 효자는 하늘이 내린다고 했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각국의 효자 종목도 천부의 재능을 타고난 것일까. 효자 종목에 숨어 있는 사회문화적 맥락을 살펴봤다.
종주국 효과와 선점 효과
효자 종목의 배경을 따질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종주국 효과다. 해당 종목을 처음 시작한 나라일수록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일찌감치 갖췄기 때문이다.
113년 전통을 가진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를 통해 볼 수 있듯이 프랑스는 사이클 강국이다. 1896년 아테네에서 열린 첫 근대 올림픽에서 프랑스는 사이클에 걸린 금메달 6개 가운데 4개를 휩쓴 것을 시작으로 역대 올림픽에서 금메달 42개, 은메달 28개, 동메달 27개를 얻었다. 금메달 수도, 전체 메달 수도 세계 1위다.
자전거 효시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사이클 대회가 처음 열린 곳이 프랑스라는 것은 정설이다. 사이클 종주국인 셈이다. 프랑스에서 ‘투르 드 프랑스’를 연구했던 김성주 전 대한자전거연맹 부회장은 “1990년 유학 시절 당시 한국의 등록 선수는 200명 정도였지만 프랑스는 12만 명이 넘었다. 투르 드 프랑스의 인기에 사이클 선수가 되겠다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고 말했다.
영국이 역대 올림픽 조정에서 금메달 28개를 따내 미국과 함께 조정 강국의 지위에 오른 것 역시 비슷한 이유다. 조정의 발상지인 영국의 템스 강에서 1829년부터 해마다 열리는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의 조정 라이벌전은 2만여 명이 지켜보고 BBC에서 생중계를 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이벤트는 영국에서 조정 인구의 저변을 넓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고대 올림픽이 기원인 근대5종의 최강국은 헝가리다. 지난해 기준 인구 982만 명의 작은 나라 헝가리는 올림픽 이 종목에서 금메달 9개, 은메달 8개, 동메달 5개 등 총 22개의 메달을 가져갔다. 모든 국가를 통틀어 가장 많다. 이는 ‘선점 효과’ 덕분이라는 게 전문가들 평가다. 경쟁이 상대적으로 덜하던 시기에 좋은 성적을 낸 덕분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받고 지원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때 첫선을 보인 근대5종에서 헝가리는 1950년대부터 최강국으로 부상했다. 헝가리는 근대5종에 포함된 펜싱, 수영, 육상, 사격, 승마에서도 강국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여름올림픽에서 메달을 가장 많이 딴 나라 10곳 중 7곳이 유럽 국가인 것도 선점 효과로 풀이할 수 있다. 제1회 올림픽이었던 아테네 대회 정식 정목 9개 중에서 펜싱, 사격, 테니스, 사이클은 당시 유럽에서만 하던 종목이었다. 미국과 호주도 문화적 전통이 유럽과 가깝다. 올림픽 초기부터 이 나라들이 잘하는 종목을 두고 경쟁하며 실력을 키운 데다 종목별 노하우 축적 수준에서도 다른 나라와 차이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투자 효과와 후광 효과
중국이 이처럼 배드민턴 강국이 된 데는 탁구와 함께 국가적인 육성 종목으로 집중적인 관리와 투자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배드민턴 등록 선수만도 1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의 관심은 후광 효과로 이어진다. 집중적인 투자를 통해 특정 종목에 ‘돌연변이’ 같은 스타 선수가 나타나면 그를 롤 모델로 삼는 선수들이 대거 등장하며 효자 종목이 될 기반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펜싱은 프랑스가 종주국이지만 이탈리아의 네도 나디가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 6개 종목에서 5개의 금메달을 싹쓸이한 뒤부터 무게 중심이 서서히 이탈리아로 옮겨 갔다. 한국의 ‘박세리 키즈’가 현재 세계 여자 골프를 평정하고 있듯이 이탈리아의 ‘나디 키즈’는 1940년대 이후 세계 펜싱의 주류가 됐다.
프랑스가 절대 강자였던 사이클에서도 최근 투자 효과로 큰 변화가 생기고 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1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를 따는 데 그쳤던 영국 사이클은 2008년 베이징과 2012년 런던에서 각각 금메달 8개를 휩쓸었다. 김성주 전 부회장은 “1980년대 후반부터 사이클 과학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영국은 2000년대 들어 사이클에 대한 투자를 크게 늘렸다. 스포츠토토를 통해 재원을 마련했는데 연간 100억 원이 넘을 정도의 거액이었다. 베이징에서 확실한 효과를 본 뒤에는 투자액이 더 늘었다”고 말했다. 김연자 한국체대 교수는 “배드민턴을 통해 세계 최고의 스타에 오르는 중국 선수들이 쏟아지면서 체격 조건이 뛰어난 유망주들이 배드민턴에 몰렸다. 배드민턴 저변 확대와 발전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무시할 수 없는 유전-환경적 효과
아프리카의 케냐는 올림픽에서 따낸 금메달 25개 중 24개가 육상 중장거리에서 나왔다. 케냐가 이 분야에 강한 이유로 전문가들은 유전과 환경의 효과를 꼽는다. 케냐에는 ‘소 도둑질’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결혼을 하려면 소를 훔쳐야 했는데 걸리면 곧바로 죽음이었다. 이 때문에 최고 마라토너만이 아내를 얻을 수 있었고 수백 년을 거치며 가장 잘 달리는 유전자만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미국의 과학전문지 ‘사이언스’는 케냐 선수들에 대한 연구에서 “다른 나라 선수들에 비해 다리가 가늘고 종아리 무게가 400g 덜 나가기 때문에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연비’가 좋기 때문에 같은 양의 산소를 마셔도 케냐 선수들은 더 먼 거리를 갈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케냐 선수들의 골격근에는 에너지를 많이 뿜어내는 데 도움이 되는 효소가 집중돼 있다는 점도 밝혀냈다. 사이언스의 결론은 ‘유전적 요인’이었다. 물론 케냐가 육상 중장거리 강국이 된 데는 유전자 효과만 있는 건 아니다. 영국 식민지였던 역사 때문에 영어가 잘 통한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최신 육상 이론이나 훈련법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던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역사적인 환경은 하키 강국 인도를 설명할 때도 적용된다. 인도는 올림픽 하키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8개)을 땄다. 현대적인 하키가 시작된 영국의 군인들이 식민지 인도에 주둔할 때 인도인들에게 전파하면서 하키는 인도의 국가 스포츠가 됐다. 인도에서 분리된 파키스탄이 하키에서 인도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승마 강국 독일을 설명하는 데도 역사적 배경이 필요하다. 독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50년부터 전쟁 부상자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형태의 치료 방법으로 승마 치료를 인정했다. 이를 위해 말을 많이 키우게 됐고 이는 국민의 승마 일상화로 이어졌다. 학교체육을 통해 일찌감치 승마를 시작하게 됨에 따라 독일에서는 승마를 즐기는 사람만 170만 명에 육박하고 승마 클럽도 7000개가 훨씬 넘는다.
선수들에게 ‘헝그리 정신’을 갖게 하는 경제적 환경도 효자 종목을 탄생시키는 변수 가운데 하나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우사인 볼트의 조국 자메이카가 육상 단거리 종목에서 미국을 뛰어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자메이카의 2014년 1인당 국민소득은 5133달러로 한국 1인당 국민소득의 25%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돈이 들지 않는 육상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자메이카 청소년들에게 최고의 꿈은 국내에서 열리는 육상대회에서 입상해 국가의 지원을 받아 해외로 유학을 가는 것이다. 해외 대학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며 최고의 선수로 성장하기만 하면 볼트와 같이 돈과 명예를 한 번에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 헝가리 근대5종서만 22개 메달… 경쟁 덜한 종목 ‘선점 효과’ 톡톡
자메이카 ‘볼트 효과’로 육상 강국
자연 환경도 무시할 수 없다. 헝가리가 카누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것은 헝가리 땅을 가로지르는 다뉴브 강과 벌러톤 호수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누가 일상화되면서 헝가리의 카누 선수층은 한국의 태권도 선수층만큼 두껍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부터 채택된 카누 종목에서 헝가리는 러시아(금 31개), 독일(금 28개)과 함께 22개의 금메달을 따내 세계 최강국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호주가 올림픽 수영에서 강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도 도시들이 해변을 따라 조성된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바다와 친숙해진 호주 국민들이 수영을 일상생활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수영 선수의 저변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옛 소련 등 동유럽권 국가들이 체조에서 강국의 지위를 누리는 것 역시 추운 겨울이 길다는 자연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배드민턴의 발상지인 영국을 중심으로 북유럽의 덴마크가 배드민턴 강국으로 손꼽히는 이유도 같다. 겨울이 긴 북유럽에서는 배드민턴과 핸드볼 등 실내 스포츠가 인기를 끌고 있다. 일찍이 학교체육에서 배드민턴을 권장하는 것도 배드민턴 인구 확보에 긍정적인 효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영원한 효자 종목’은 없다
유전적 효과나 환경 효과는 쉽게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종주국 효과나 선점 효과는 힘을 잃고 있다. 반면 갈수록 힘을 발휘하는 것은 투자 효과다. “스포츠 선진국들이 큰 관심을 갖지 않는 틈새시장을 노리겠다”며 시작한 한국 양궁 역시 대기업의 과감하고 지속적인 투자가 없었다면 진작에 효자 종목 자리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미국이 올림픽에서만 10개 넘는 효자 종목을 거느리며 스포츠 최강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배경은 ‘돈’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최근 경제 발전 수준과 올림픽 메달 개수가 연관성이 크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미국은 1890년 이후 세계에서 국민총생산(GDP)이 가장 높은 국가였다. GDP가 두 번째로 높은 영국과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골드만삭스 분석대로라면 미국이 스포츠 최강국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다. 미국과 함께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한 중국이 올림픽에서 갈수록 힘을 발휘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손환 중앙대 교수(체육교육)는 “일본의 유도나 한국의 태권도 등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종주국 지위를 확실히 누렸지만 최근에는 그렇지 못하다. 한국 배드민턴 영웅 박주봉이 일본 대표팀 감독을 맡아 일본 배드민턴 수준을 끌어올렸듯이 정보 교류가 활발하고 기술 전파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특정 종목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면 절대 강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세계 스포츠는 미국과 중국 정도를 빼곤 무한 경쟁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