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최영훈의 법과 사람]“천황을 꼭 ‘일왕’이라고 해야 하나”

입력 | 2016-08-06 03:00:00


최영훈 수석논설위원

얼마 전 일본 도쿄에서 만난 기업인 A는 한류 붐이 식고 한국 기업들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며 한숨부터 지었다. 김영삼 정부 때 악화된 한일관계는 이명박(MB) 정부 때 MB의 독도 방문과 뒤이은 ‘일왕 사죄 발언’ 때문에 최악으로 치달았다. 담소 중 “천황을 언제까지 일왕으로 불러야 하나”라고 그가 반문했다.

A의 회사는 국내 기업 중 일본 내 현지화에 가장 성공한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일본의 ‘비관세 장벽’을 어느 나라가 문제 삼으면 이 기업의 사례를 일본 정부가 거론할 정도다. 세계화와 현지화를 동시에 구사한 ‘글로컬(glocal) 전략’으로 업계 10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잘나가는 그런 기업마저 성장이 둔화하고 있다.

A는 독립투사의 후손으로 민족의식이 강하다. 의도적인 혐한(嫌韓) 기사를 잇달아 게재한 유수의 일본 신문에 의도적으로 광고를 배정하지 않은 일도 있다. ‘천황을 일왕으로 불러야만 직성이 풀리는 협량(狹量)’을 탓하는 그의 발언에 조금 놀랐다. 천황제에 반대하는 극소수가 있지만 일본인 절대다수는 천황을 숭배한다.

본보 역시 천황을 일왕으로 표기한다. 예외적으로 직접 인용한 발언이나 문서에 천황이라고 돼 있거나 ‘천황제’를 설명할 때만 천황으로 쓴다. 그러나 ‘큰 나라 미국 대통령도 대통령이고 작은 나라 한국도 대통령인 게 말이 되느냐’며 일본의 극우 언론이 한국은 ‘소통령’이라고 한다면…. 불쾌하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우리도 ‘천황’을 일왕으로 낮춰 부르니까.

‘천황은 일본국(日本國)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이 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 일본 헌법 제1조다. 이 나라 최고 법 첫머리에 천황제를 규정한 것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덴노 헤이카(天皇 陛下)’라고 불렀던 천황은 여전히 일본인들의 뇌리에 ‘살아있는 신’이나 다름없음을.

현행 일본 헌법에 근거해 처음 즉위한 아키히토 일왕이 생전(生前)에 퇴위를 시사했다. 올해 만 82세의 일왕이 ‘왕위를 왕세자에게 물려주겠다’는 것이다. 아키히토는 8일 퇴위 의사를 공표할 계획이다. 내년이나 그 이듬해 장남 나루히토 왕세자가 승계하면 200년 만의 생전 퇴위를 기록하게 된다.

아키히토는 부친 히로히토와 달랐다. 1975년 7월 17일 2차 세계대전 희생자들을 기리는 ‘비명의 탑’ 참배를 위해 오키나와로 갔다. 두 청년이 그를 향해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했다. 23만 명을 희생시킨 전범의 자식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게 범행 동기였다. 당시 25세의 대학생이던 지넨 이사오는 “천황은 전범이며 범죄를 사죄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려 했다”고 밝혔다. 아키히토는 현장이 수습된 뒤 침착하게 참배를 마쳤다.

아키히토는 1992년 중국을 처음 방문하고 이듬해 오키나와를 방문한 데 이어 태평양전쟁의 격전지를 잇달아 방문했다. ‘위령(慰靈)의 여정’인 셈이다. 2005년 사이판의 한국평화기념탑도 참배했다. 2001년 12월 생일 회견 때는 “간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쓰여 있는 데 대해 한국과의 연(緣)을 느끼고 있다”고 말해 일본열도에 파문이 컸다.

아키히토는 4년 전 “우리(일왕 부부)가 한국을 방문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다. 생전 퇴위가 이뤄지면 아키히토 부부의 방한이 꼭 이뤄지길 바란다. 꽁꽁 얼어붙은 한일관계가 해빙기를 맞는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빈다.

최영훈 수석논설위원 tao4@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