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서점 낭독모임을 찾아서
《 “…가만히 있으면/미쳐버릴 것 같다거나/죽고 싶다거나 죽여 버리고 싶어진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면/하지 마./네 안의 태양이/네 속을 불태우고 있는 게 아니라면/하지 마.…” 지난달 21일 저녁, 서울 마포구 희우정로의 작은 서점 ‘책방 만일’에 찰스 부코스키의 시 ‘그래 작가가 되고 싶으시다고?’가 울려 퍼졌다. 황유원 시인이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는 영어 원문도 낭독했다. ‘if∼’로 시작해 ‘don‘t do it’이 반복되며 리듬이 느껴졌다. 대학생, 회사원, 주부 등 20, 30대 남녀 16명이 모여 시와 소설을 돌아가며 소리 내 읽고 있었다. 최근 낭독 모임이 확산되고 있다. 작품을 분석하거나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라 단지 낭독만 하는데도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유는 뭘까. 》
○ 누워 있는 글자를 소리를 통해 세우다
낭독회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과 동떨어진 듯 느릿느릿하고 아늑한 느낌을 줬다. 시 ‘연두에 울다’(나희덕)를 낭송한 여성은 “해질녘에 하늘을 봤는데 참 예뻤어요”라고 말했다. 기자(왼쪽에서 두 번째)도 낭독 후 “학창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비닐의 몸을 통과하는 무한한 확률들/우리는 유려해지지 말자/널 사랑해.”(이장욱 ‘근하신년-코끼리군의 엽서’)
“처음 만났던 날부터 당신을 조각내었다/함께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당신을 온전히 담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곽은영 ‘불한당들의 모험10’)
그림책 ‘아무것도 아닌 것’(쇠렌 린)이나 ‘야간 비행’(생텍쥐페리)을 읽는 이도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하거나 낭독만 하고 끝내기도 했다. 기자는 일본에서 50년간 서점을 운영하는 책방지기를 인터뷰한 ‘시바타 신의 마지막 수업’의 일부를 낭송했다.
회사원 차서현 씨는 “사람의 목소리, 호흡, 떨림을 느끼며 텍스트에 따라 그려 낸 이미지에 잠길 수 있어서 좋았다. 육성으로 러시아어를 듣기는 처음인데 참 아름다웠다”며 밝게 웃었다. 주부 안혜윤 씨는 “누워 있는 글자를, 소리를 통해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며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문요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정제된 언어를 통해 감정을 밖으로 표출하는 행위는 내부에 꾹꾹 쌓여 있던 스트레스를 해소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회사원 김경란 씨는 낭송회 참석이 다섯 번째다. 그는 “회사에서 높은 톤으로 싸우듯 말하는 소리를 듣다가 정제된 언어를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들으니 낯설면서도 편안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문학 작품을 소리 내 읽는 것이 심리적인 안정을 준다고 말한다.
김상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 담긴 문학 작품을 곱씹으며 읽으면 스스로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다. 시각과 청각, 발성할 때 몸의 떨림 등 여러 감각 기관을 활용할수록 만족감이 높아지고 기억도 오래 간다”고 말했다. 읽을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은 물론이고 낭송할 때 주목을 받으며 주인공이 되는 기분도 느낄 수 있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