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재 도쿄 특파원
토론회 말미에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한 일본인 대학 교수가 “한국이라면 이런 토론회 자체가 열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중석에 있던 한 한국인이 손을 들고 “이의가 있다. 당신은 우월적 시각에서 한국을 보고 있다”고 반발해 토론회가 잠시 중단됐다. 최근 화해치유재단의 김태현 이사장이 캡사이신(고추 추출물)액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인 교수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두고 찬반 세력이 모여 토론할 장이 마련될 수 있을까(물론 찬반 어느 한 진영의 토론회는 최근 한국에서도 있었다).
도쿄대 토론회에선 박 교수의 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A조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B조가 치열하게 맞섰다. 일본에서 보기 드물게(?) 객석에서는 박수와 야유가 교차했고 분위기가 과열되면서 일부 참석자는 중간에 퇴장했다. 하지만 누구도 단상을 점거하거나 물리력을 행사하진 않았다.
1990년대 중반 아시아여성기금을 주도했던 와다 교수는 “지금 누구도 합의를 파기할 수 없다. 문제가 있는 부분은 보완이나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밝혔다.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어 발전 계승하기 어려운 합의이기 때문에 폐기해야 한다”고 맞섰다.
현실론과 원칙론의 싸움이었다. 전자는 한일 정부 간 합의를 없었던 것으로 하기는 어려우며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성향을 볼 때 더 나은 협상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반면 후자는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이번 합의는 진전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참석자는 “일본 정부가 출연하는 10억 엔(약 110억 원)으로 위안부 소녀상을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질의응답이었다. 백발의 청중이 손을 들었다. 한 할머니는 “필리핀 위안부를 25년 동안 지원해 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뒤 합의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다른 할머니는 ‘개인적으로 오랜 기간 위안부 할머니와 교류해 왔는데 이미 다 돌아가셨다’며 생전 피해자의 목소리를 전했다. 오랜 시간의 무게가 담긴 이들의 발언에서는 간절함과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누구도 소리를 지르거나 단상으로 뛰어나가지 않았다. 사회자의 지명을 받아 질문하고 앉을 뿐이었다.
올해 두 차례 도쿄대에 모인 전문가와 청중 가운데는 캡사이신 공격을 한 21세 청년이 태어나기 전부터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이들이 많았다. 피해자를 제외하면 지난해 미진한 합의에 가장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어떻게든 합의를 살리기 위해 아주 절실하게 노력하는 이들도 그 안에 있었다. 이들이 장시간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는 것이 캡사이신액을 들 줄 몰라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 청년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장원재 도쿄 특파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