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만에 ‘생전 퇴위’ 뜻 밝혀 왕실전범에 생전퇴위 규정없어… 개정에 2, 3년까지 걸릴수도 개헌 논의 상당기간 지연 불가피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생전 퇴위 의향을 담은 대국민 메시지를 8일 오후 발표했다. 일왕의 생전 퇴위는 1817년 고카쿠(光格) 일왕 이후 약 200년 만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이날 궁내청 홈페이지에 공개된 10분가량의 동영상에서 “차츰 진행되는 신체의 쇠약을 생각할 때 지금까지처럼 몸과 마음을 다해 상징으로서의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 어려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생전에 물러나겠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밝혔다.
그는 “상징 천황의 책무가 늘 끊기는 일 없이 안정적으로 이어지는 것만을 생각한다”고 말해 자신이 일왕으로서의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되기 전에 퇴위하는 것이 좋다는 뜻을 표명했다.
일본 국민들은 아키히토 일왕의 결단을 반기는 분위기다. 이날 각 TV가 인터뷰한 시민들의 반응도 “그간 너무 고생 많으셨다”거나 “어려운 곳에서 늘 국민과 함께 하셨다. 감사를 전하고 싶다”며 눈물짓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생전 퇴위 과정은 간단치 않다. 우선 일본 왕실의 법도를 규정한 현행 ‘왕실전범(典範)’에는 생전 퇴위 규정이 없다. 전범을 개정하거나 특별법을 만들어야 한다. 일본 헌법상 일왕은 정치에 관여할 수 없기 때문에 생전 퇴위를 위한 준비 작업의 부담은 고스란히 아베 정권이 떠안을 수밖에 없다.
왕실전범을 개정하려면 길게는 2∼3년이 걸려 아키히토 일왕에 한해 특별법을 만들어 생전 퇴위를 인정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여성 일왕 허용 문제도 함께 다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아베 총리를 따르는 개헌 세력들은 일왕의 생전 퇴위 논의가 개헌에 찬물을 끼얹지 않을까 우려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개헌파가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에서 개헌 발의에 필요한 정족수(각각 3분의 2)를 확보해 시기를 저울질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전범 개정 작업이 시작되면 개헌 논의는 상당 기간 연기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아키히토 일왕이 평화헌법 개헌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를 목표로 한 개헌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기가 상당히 부담스럽게 됐다.
“호헌파인 아키히토 일왕의 노림수가 개헌 저지에 있는 것 아니냐”는 수군거림도 적잖이 들린다. 아키히토 일왕은 이날 대국민 메시지에서도 “헌법의 정신에 따라”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특히 헌법을 고쳐 일왕의 지위를 ‘일본의 상징’에서 ‘국가원수(國家元首)’로 격상해야 한다고 주장해 온 일본회의 등 보수단체는 내부적으로 맹렬하게 반발하는 분위기다. 일왕의 ‘국가원수’화는 집권 자민당이 2012년에 내놓은 헌법 개정안 초안에도 들어 있다. 일본 보수의 또 다른 뿌리인 신사(神社)계는 여성 일왕에 대해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고 일본 언론들은 전했다. 생전 퇴위가 시행되면 나루히토(德仁) 왕세자가 일왕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도쿄=서영아 특파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