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따라 달라진 日王의 위상
① 메이지 일왕의 1907년경 초상. 그는 메이지 혁명의 구심점으로 추앙받았다. ② 1945년 9월 패전 직후 더글러스 맥아더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을 찾아간 쇼와 일왕(오른쪽). 맥아더 옆에 선 쇼와 일왕의 왜소한 모습은 그를 ‘살아 있는 신’으로 받들던 일본 국민들에게 패전의 현실을 실감케 했다. ③ 1989년 즉위한 아키히토 일왕은 이듬해 11월 이세 신궁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마차를 타고 식장으로 향하는 모습.
역사적으로 볼 때도 일왕의 위상은 시대에 따라 변천해 왔다. 근대로 넘어가는 메이지(明治) 시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패전에 이르는 60여 년 동안 일왕은 ‘살아 있는 신(現人神)’으로 추앙받으며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그러나 이 기간 일본은 정세 판단을 그르쳐 침략전쟁으로 치달았고 결국 패전국이 됐다.
‘덴노(天皇·천황)’라는 칭호가 정착된 것은 7세기 덴무(天武·재위 673∼686년) 일왕 때부터다. 덴무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일왕의 지위를 절대화했다. 헤이안(平安) 시대(794∼1192)까지 일왕은 정치와 제사의 정점에 있다가 1192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鎌倉) 막부를 열면서 권력에서 멀어졌다. 이후 일왕은 1868년 메이지 유신 전까지 교토(京都)에 머무는 실권 없는 군주였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기초해 1889년 공포된 메이지 헌법(대일본제국헌법)은 제1조에서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이를 통치한다’고 규정하고 제4조에서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한다’고 밝혔다.
이 헌법 아래에서 쇼와(昭和·히로히토·재위 1926∼1989년) 일왕이 ‘대원수’로서 육·해군을 통수하며 태평양전쟁을 치렀다. 쇼와 일왕은 패전 후 연합군 통치기인 1946년 1월 1일 자신이 ‘신’이 아님을 천명하는, 이른바 ‘인간 선언’을 했다. 그해 11월 3일 공포된 현행 헌법은 일왕을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헌법 제1조)으로 규정했다. 일왕은 헌법이 정한 국사 행위(외국의 대사 접수, 각종 의식 주재 등) 말고는 국정에 관여할 수 없게 됐다.
쇼와 일왕은 몇 차례 퇴위를 언급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패전 직후에는 전쟁 책임을 지고 퇴위할 의향을 내비쳤으나 연합국군총사령부(GHQ)는 ‘천황제’를 유지하는 게 점령 정책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일본 정계도 쇼와 일왕의 전쟁 책임을 면제받고 ‘천황제’를 보존하기 위해 전쟁 포기를 명시한 현행 평화헌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아키히토는 현행 헌법 아래에서 처음 즉위한 일왕이다. 일각에서는 그가 왕실전범에 규정이 없는 생전 퇴위를 하려는 것은 일왕에게 권력이 집중됐던 메이지 시대 이후의 왕실 잔재를 청산하고 현대에 어울리는 왕실의 모습을 구현하려는 생각 때문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일본 정부는 9월 전문가 회의를 열어 광범위한 의견 수렴부터 시작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