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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 사물 이야기]부채

입력 | 2016-08-10 03:00:00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날 오후에 인사동에 갔다. 아는 이의 전시도 보고 오랜만에 인사동 길을 좀 걸어 다녀 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햇볕 때문에 미술관에서 나오자마자 에어컨이 켜져 있을 카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관광객들, 상점 앞의 사람들 틈에서 무언가 팔락거리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둥글고 납작한 모양의 둥글부채,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쥘부채들. 외국인 관광객들은 대개 태극선이 프린트된 둥글부채를 들고 있는 것 같다.

올여름 휴가도 동생이 살고 있는 도쿄에서 보냈다. 한여름의 도쿄라면 더위뿐만 아니라 말도 못하게 높은 습도에도 익숙해지지 않으면 곤란하다. 지하철을 타고 있을 때나 우에노 공원 같은 데를 어슬렁거리다가 나도 모르게 행인들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각자의 방식대로 더위를 참고 이기고 있는 사람들을. 일단 손수건은 기본, 그 다음은 부채. 보통은 쥘부채들이다. 땀이 나면 손수건으로 꾹꾹 눌러 닦고 손목을 약간씩만 움직여 열기로 달아오른 얼굴에 대고 부채를 부친다.

‘단오 선물은 부채, 동지 선물은 달력’이라는 속담도 있고 임금이 단옷날 신하들에게 부채를 선물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지만 부채는 이제 너무 흔해져버렸거나 대접받지 못하는 사물이 돼버린 감이 없지 않다. 교실에 선풍기 한 대만 간신히 털털거리며 돌아가던 때가 있었다. 체육 시간을 마치고 나면 책받침으로 부채질을 하거나 다 쓴 연습장을 한 장씩 찢어 같은 간격으로 앞뒤로 착착 접어 종이부채를 만들어 부치곤 했다. 그래서인가 나는 지금도 어디선가 홍보용으로 공짜 부채가 놓여 있으면 일단 하나는 챙기고 본다. 햇빛도 막고 얼굴도 가리고 모기도 쫓고.

관측사상 서울 최고 기온을 기록했던 1994년 여름의 38.4도의 더위도 잊을 수 없다. 간절히 원해서 스물여섯 살에 대학에 입학한 해였다. 여름방학이었고 방에서 쭈그리고 앉아 습작 소설을 쓰고 있는데 떨어진 땀이 노트에 번져서 더 이상 유성 펜을 쓰지 못하고 연필로 바꿔 들어야 했다. 연신 땀을 훔쳐가면서 한 손엔 부채를, 한 손으론 연필을 쥐고 글을 써나갔다. 그 습작 소설이 내 등단작을 만들어내게 될 거라고는 그때 알 리 없었지만.

최근에는 이런 부채를 봤다. 초등학생 조카들이 여름방학 전날 학교 앞에서 받아 온 것인데 활짝 웃는, 꼭 ‘철수와 영희’ 같은 소년 소녀의 얼굴이 앞뒤로 그려져 있고 이렇게 크게 쓰여 있다. ‘아이고 신나라.’

나에겐 아직도 여름의 필수품인 부채를 든 채 정현종의 시 제목 일부처럼 ‘태양이 떵떵거리’고 있던 인사동 길을 잠시 걸어 다니다 왔다.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