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전 ‘유전자 가위’ 기술 개발… 필요한 DNA 정밀하게 끼워 넣어 운동선수들 경기 능력 강화할수도
2013년 세상을 떠난 핀란드 스키선수 에로 멘튀란타는 특이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다. 그는 적혈구를 만드는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있어 남들보다 몸속에 산소를 1.5배나 많이 보유할 수 있었다. 지구력이 남달리 강해 1960, 1964년 겨울올림픽 크로스컨트리 스키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는 등 총 7개 메달을 획득했다.
멘튀란타 선수처럼 돌연변이는 아니라도 세계적인 운동선수 중엔 ‘유전자 금수저’가 많다. 휴 몽고메리 영국 런던대 교수팀은 1998년 ‘안지오텐신 변환 효소(ACE)’ 유전자가 지구력이나 순발력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 과학저널 ‘네이처’에 발표했다. ACE 유전자는 II, ID, DD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장거리 육상선수는 대부분 지구력이 우수한 II나 ID형 유전자를 많이 가지고 있고, 단거리 육상선수들은 대부분 순발력이 뛰어난 DD형 유전자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슈퍼유전자로 바꿔치기 가능할까
동물 실험에선 이미 유전자 도핑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 작년 7월 김진수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과 윤희준 중국 옌볜대 교수 공동 연구진은 ‘마이오스타틴’이라는 유전자를 교정해 일반 돼지보다 근육량이 많은 슈퍼돼지를 만들었다. 이 연구에 참여한 김석중 툴젠 연구소장은 “마이오스타틴 돌연변이는 실제 세계적인 보디빌더들에게서 간혹 발견되는 돌연변이”라고 말했다.
이 방법은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도핑은 아니지만 같은 방법을 인체에 적용한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중국은 지난달 세계 최초로 사람의 세포를 가지고 크리스퍼 임상 시험을 시작했다. 면역세포 유전자를 크리스퍼로 교정한 다음, 다시 사람 몸속에 넣어 폐암을 치료하는 방식이다. 김석중 소장은 “내년에는 미국에서 사람의 안구에 직접 크리스퍼를 주사해 유전병을 치료하는 임상 시험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불법 도핑 땐 적발 가능해”
유전자 가위는 의료용 치료기술로 개발됐지만 사실 치료와 도핑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실제로 운동선수들이 유전자를 교정하고 경기장에 설 확률도 있는 셈이다. 다만 안정성 등이 확보되지 않아 아직 이 방법으로 도핑을 시도하는 운동선수를 찾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만약 실제로 누군가 유전자 도핑을 한다면 적발할 수는 있을까. 호르몬이나 약물 반응을 살펴보는 현재의 도핑 검사 방법으로는 적발이 어려우므로 새로운 검사 기준이 필요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멘튀란타 선수처럼 돌연변이 유전자를 타고난 경우 몸속에 있는 모든 세포의 유전자가 같다. 하지만 유전자 도핑으로 10조 개에 이르는 몸속 세포를 전부 교체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보통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주사한 부위의 주변 세포만 유전자가 교체된다. 육상선수라면 다리 근육만 도핑하는 식으로 적용될 확률이 높다. 김 단장은 “인체 여러 곳의 세포를 떼어내 유전자 검사를 시행한다면 충분히 적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변지민 동아사이언스 기자 her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