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수저론은 한국 사회의 계층 차이를 상징하는 대표적 표현이다. 집안 배경이나 경제력 등에 따라 금수저, 흙수저로 나누는 수저론은 각 분야로 확장하고 있다. 청년들의 취업을 위한 필수 스펙 중 하나인 인턴에도 수저론이 반영됐다. 이른바 ‘금턴과 흙턴’이다. 사상 최악의 취업난 속에서 허우적대는 대한민국 청년들이 맞닥뜨린 또 하나의 냉혹한 현실이다. 문제는 인턴 채용시장에서 절대소수인 금턴과 절대다수인 흙턴의 양극화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턴의 꼭대기에는 금턴이 있다. 이른바 금수저 출신만이 갈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턴 아래로는 ‘은턴’(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보장받는 인턴)과 ‘흙턴’(정직원과 똑같이 일하지만 최저임금 이하를 받는 인턴) 순이다.
하지만 이력서에 적어 넣을 스펙 하나가 아쉬운 청년들은 흙턴에도 목을 맨다. 인턴 채용 과정에서 계속된 탈락 끝에 서류 전형에서 합격하면 합격의 기쁨이 마치 오르가슴처럼 최고조에 달한다는 뜻의 ‘서류가즘’이란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다.
박 씨는 “함께 최종면접을 본 후보자 두 명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내정돼 있던 상태였다. 그들은 ‘들러리’에 불과했다. 면접을 보기 전에 담당 부장과 따로 만나기도 했는데, 부장은 대놓고 ‘뽑아주겠다’고 하진 않았지만 어차피 인턴은 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사실 박 씨 역시 한 달 전 ‘아픔’이 있었다. 국회의원실 인턴에 지원했는데 면접은커녕 ‘서탈(서류 탈락)’의 쓴맛을 본 것이다. 박 씨는 “국회에는 인맥이 없어 ‘약’을 치지 못했다. 국회 인턴직이야말로 인맥으로 꽂고 꽂히는 곳이라 하더라”며 “사돈이 없어 ‘팔촌의 사돈’까지 동원했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인턴의 계급화가 심화된 원인은 소위 금턴이라 불리는 인턴직의 채용 과정이 폐쇄적이기 때문이다. 월급과 근무시간 등 조건이 좋고 취업에 큰 도움이 될 스펙이지만 정식 공고를 내지 않거나 내더라도 결과는 정해진 경우가 많다는 게 청년들의 하소연이다.
금턴 채용은 그들만의 리그
10일 서울의 한 대학 게시판에 붙은 인턴 및 취업 공고를 학생들이 유심히 보고 있다. 학생들은 취업 스팩을 쌓기 위해 인턴 자리를 얻으려 애를 쓰지만 실력만으로 양질의 인턴직을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서울의 한 명문대 경영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박모 씨(25)는 1학기를 마치고 금융계 회사 여러 곳에 인턴을 지원했지만 모두 탈락했다. 그러던 중 같은 학과 친구가 유명 증권사에 인턴으로 채용됐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그는 “인턴 채용 공고가 뜨지 않았던 회사여서 어리둥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친구가 그 증권사에 다니고 있는 아버지의 지인을 통해서 시험도 면접도 없이 채용됐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했다.
서울 지역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재학생 김모 씨(28·2학년)는 현재 대형 로펌 인턴 지원을 준비 중이다. 그는 “‘빅펌’(10대 대형 법무법인을 일컫는 말) 인턴은 성적이 로스쿨 내 최상위권이 아니면 사실상 인맥 없이 들어갈 방법이 없다”며 “인맥이 없어 성적에 목숨 거는 사람과 ‘끌어주겠다’고 하는 인맥이 있는 사람은 수업 들을 때 표정부터 다르다”고 말했다.
명문 사립대 로스쿨생 정모 씨(26·여)도 “빅펌 인턴의 경우 내정자가 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라며 “동기 중 두 명이 성적은 중하위권인데 부모 인맥을 통해서 ‘김광태(김앤장 광장 태평양)’ 인턴을 갔다. 걔들보다 성적은 좋지만 인턴에 떨어졌던 친구들은 ‘없으면 열심이나 하자’라며 자조적으로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흙턴 채용하며 갑질하는 회사들
금턴은 소수이기 때문에 대다수의 청년들은 흙턴 자리라도 얻기 위해 애를 쓴다. 청년 취업난 시기에 직장을 구하려면 이력서에 기재할 인턴 경력과 바로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경험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또 일부 대학에서는 특정 강의를 수강할 수 있는 조건에 인턴 경험을 넣거나, 졸업 필수조건으로 정해놓기도 한다.
이렇다 보니 기업은 청년들의 절박한 사정을 악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헐값에 청년 노동력을 사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문화가 여전히 팽배하다. 올해 초 마케팅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고모 씨(26)는 “직원들은 앞에서 ‘인턴이 무슨 야근을 해?’라고 말하지만 정작 야근 없이 불가능한 일을 시켜놓고 발뺌한다”며 “회사 대표의 외부 강연자료를 만들기 위해 수당도 못 받는 야근을 했고, 인턴 종료 후에도 이틀이나 더 출근했지만 월급은 딱 30만 원만 받았다”고 말했다.
흙턴은 취직 후 업무에 도움이 되는 일보다는 단순노동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하반기 금융기관에서 3개월간 인턴으로 일한 장모 씨(24)는 출근 첫날 백화점에 설치된 부스에서 쇼핑하는 백화점 손님들에게 팸플릿을 나눠주는 일을 했다. 장 씨는 “사실상 전단 알바나 다름없어 취업할 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경험이었다”며 “주말에도 출근해야 했고 평일 이틀을 쉬었다. 월급은 최저임금에 딱 맞춰서 줬다”고 말했다.
지난해 가을 대학생 고모 씨(27)는 갖은 노력 끝에 서울 유명 호텔 마케팅팀 인턴으로 채용됐다. 고 씨가 한 일은 주로 마네킹 나르기, 호텔 홍보 잡지 수레에 실어 운반하기, VIP 고객에게 보낼 선물 포장하기였다. 고 씨는 “호텔에서 행사가 열리면 마네킹 7, 8개를 지하 3층에서 지상 1층까지 3시간 동안 계단으로 날랐다”며 “15일 동안 손님에게 나눠줄 인쇄물을 수레에 싣고 매일 2시간 동안 끌고 다녔다. 늦가을인데도 셔츠와 재킷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한 달 월급 30만 원, 6개월 근무를 보장받았지만 일에 환멸을 느껴 3개월째에 그만뒀다.
중소 호텔에서 두 달 동안 인턴으로 일했던 류모 씨(26·여)도 “호텔 레스토랑에서 서빙하고 식기를 닦다가 회계 부서에서 계산서를 입력하고 인사 부서에서 잡일을 하기도 했다”며 “근무 강도는 정직원보다 더했지만 한 달에 20만 원을 받아 억울했다. 취직하려면 인턴 경력을 쌓는 게 시급해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한 채 허드렛일만 해야 하는 흙턴의 현실에 대해 전문가들은 “기업이 스스로 정화해야 하고, 인턴을 보호할 제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업은 정규사원 채용뿐 아니라 인턴 채용에서도 청년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보장해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며 “인턴은 정식 근로자와 다름없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경우 최초 3개월은 최저임금의 90%를 지급하는 등 수습근로자로 분류해 노동법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주영 aimhigh@donga.com·권기범·홍정수 기자
강해령 인턴기자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이영빈 인턴기자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