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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만난 사람]LA부터 리우까지… 올림픽 감동의 현장엔 늘 그가 있었다

입력 | 2016-08-13 03:00:00

허록 대한역도연맹 부회장




허록 대한역도연맹 부회장이 올림픽 등 각종 국제대회의 AD카드(출입증·오른쪽)와 1700여 개의 기념 배지가 빼곡히 달려 있는 가죽 코트(왼쪽)를 보여 주고 있다. 허 부회장은 “1970년대에 지인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돈 대 신 코트로 갚았다. 외제라 몸에 안 맞기에 배지 꽂이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며 웃었다. 하남=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출전만으로도 개인에게는 큰 영광인 올림픽. 올림픽은 4년마다 열리기 때문에 선수들도 한 번 가기가 쉽지 않다. 수많은 국제대회 가운데 단연 최고 권위인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을 ‘올림피안(Olympian)’이라 부르며 경의를 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허록 대한역도연맹 부회장(73)은 선수로서는 아니지만 올림픽을 30년 넘게 현장에서 지켜봤다. 그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부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까지 9회 연속으로 심판, 경기감독관, 배심원 등으로 참가했다.

올해 2월 97세를 일기로 작고한 김성집 대한체육회 고문을 빼고 9회 연속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인은 허 부회장이 유일하다. 올림픽의 산증인인 그에게 올림픽의 뒷이야기를 들어봤다.



모범적인 1988년, 잊지 못할 1992년

한국 역도가 올림픽 금메달을 딸 때마다 그는 현장에 있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선물한 전병관(위쪽 사진 가운데)과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정상에 오른 장미란(아래 사진 가운데). 허록 씨 제공

“예정된 경기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어요. 준비를 철저히 한 덕분이죠. 다른 나라 선수단도 만족해했어요. 벌써 30년이 다 돼 가지만 대회 운영만큼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가장 모범적이었습니다.”

1943년 서울에서 태어난 허 부회장이 역도를 처음 시작한 것은 대구중학교 시절. 서울 남대문초등학교를 다니다 6·25전쟁으로 피란을 갔던 그는 선수 출신인 학교 선배에게서 역도를 배웠다. 허 부회장은 “지금은 몸이 줄었지만 중학교 1학년 때 가슴둘레가 110cm에 달했다. 역도를 하기에 딱 좋은 체구였다”고 말했다. 보통 성인 남자가 100cm 안팎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건장한 중학생이었다.

선수로서는 역도 대회에 한 번밖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역도와의 인연은 1969년 대한역도연맹에 사무국장으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됐다.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이 서울시청이었어요. 그런데 일부 공무원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을 만큼 해 먹는 겁니다. ‘여기 계속 있으면 쇠고랑 찰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사표를 내고 역도연맹으로 옮겼죠. 당시만 해도 직원이 둘뿐인 작은 조직이었지만 대한민국 최초로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종목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꽤 능숙했던 영어 덕분에 그는 국제역도연맹(IWF) 관계자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어얀 터마시 IWF 회장(77)과의 인연도 그때부터 시작됐다. 어얀 회장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과 헝가리 체육부 장관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에게 가장 잊을 수 없는 올림픽은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다. 한국 역도 사상 첫 금메달이 나왔기 때문이다.

“52kg급 정상에 오른 전병관(47)은 1980년대 중반부터 역도연맹이 심혈을 기울여 운영한 상비군 출신입니다. 1985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며 가능성을 보인 전병관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은메달,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 금메달에 이어 1991년 한국 역도 사상 처음으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땄고 결국 올림픽까지 평정했죠. 당시 심판으로 현장에 있어 드러내놓고 좋아할 수는 없었지만 그때의 감격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전병관은 2009년 서울에서 열린 IWF 총회에서 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허 부회장은 그때 IWF의 역도 회원국 행정가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인 공로훈장 은상을 받았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1988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 조사연구원’으로 참가했던 허 부회장은 1988년 대회부터 심판, 경기 감독관, 배심원 등의 자격으로 올림픽에 나갔다. 그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더위와의 전쟁이었다”며 “냉방 시설이 완비된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당시 숙소는 에어컨만 갖다 놨지 에어컨 가동이 되지 않을 정도로 시설이 엉망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무더운데 숙소에 냉방이 안 되니 인근 상가에서 선풍기를 사 와 간신히 잤다”며 “스페인은 선진국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숙소 앞에 소매치기와 도둑이 많아 놀라기도 했다”고 말했다.

북한 고위층과 국제역도연맹의 만남도 주선


한국 역도는 역대 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4개, 동메달 4개를 땄다. 북한은 금메달 4개, 은메달 4개, 동메달 5개로 한국보다 많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만 금메달 3개를 얻은 덕분이다.

“당시 역도에서 금메달이 무더기로 나오니 북한이 난리가 났죠. 하루는 북한 선수단 통역이 배심원인 나를 찾아왔어요. 위에서 당장 국제대회를 유치하라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며 도와 달라더군요.”

그는 “사정은 알겠지만 내년(2013년) IWF가 주관하는 대회 스케줄은 이미 정해졌다. 꼭 해야 한다면 아시아역도연맹이 주관하는 대회를 알아보는 게 나을 것”이라고 얘기한 뒤 어얀 IWF 회장과의 만남을 주선해 줬다.

이 같은 만남이 결실을 맺어 북한은 2013년 평양에서 아시안컵 및 아시아 클럽역도선수권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는 한국도 출전했다. 남북 분단 후 평양에서 열린 스포츠 행사에 한반도기가 아닌 태극기가 공식적으로 등장한 첫 대회였다.

허 부회장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북한 역도가 아쉽게 금메달을 놓친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북한에 이송희라는 선수가 있었어요. 21세였던 1999년 시드니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58kg급 용상에서 세계기록까지 세운 대단한 선수였죠. 아테네 올림픽에선 감독관으로 역도 경기장에 있는데 이송희가 자기 순서에 나오지 않는 겁니다.”

그는 “이송희가 영어 안내 방송을 못 알아들었던 것 같다”며 “부랴부랴 대신 대기실로 들어가 빨리 나오라고 알려줘 간발의 차로 실격은 면했지만 금메달은 놓쳤다. 숨이 턱까지 차서 바벨을 들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경기가 끝난 뒤 북한의 장웅 IOC 위원이 허 부회장에게 오더니 ‘안내 방송에 문제가 있었다. 당신이 국제연맹을 잘 아니 항의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그는 “나는 현장을 통제하는 사람”이라며 “같은 민족이라고 원칙에 어긋난 행동을 할 수는 없다. 그나마 내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실격돼 은메달도 못 땄을 것”이라며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

구소련과 동유럽이 강세였던 역도 종목에서 일을 한 덕분에 허 부회장은 동유럽 출장이 잦았다. 1980년대만 해도 공산권 국가를 방문하려면 정보기관의 교육을 받아야 했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예외였다.

“어얀 회장 권유로 1989년 말 아예 헝가리로 이민을 갔어요. 헝가리 영주권 1호 한국인이었죠. 현지에서 식당과 여행사를 경영했는데 10년 정도 지나니까 한국이 너무 그립더라고요. 술친구들도 만나고 싶고…. 그래서 2000년에 돌아왔습니다. 헝가리에서도 IWF 관련 일은 계속했는데 1992년에는 IWF 기술위원에 당선됐어요. 4년 뒤에는 집행위원으로 뽑혔죠. 합쳐서 16년 동안 IWF 임원을 하다 보니 북한 선수단을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이 친구들 참 특이합니다. 혼자 있으면 먼저 와서 인사를 하다가도 두 명 이상 있을 때는 알은척을 안 해요.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만연한 도핑… 과감하게 새판 짜야


IWF는 리우 올림픽에 러시아 역도 대표팀의 참가를 불허했다.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개막을 앞두고 베이징과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던 선수들의 도핑 시료를 재검사한 결과 러시아 역도 선수 7명이 금지약물을 복용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수십 년 동안 현장에 있으면서 언젠가는 도핑이 큰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결국은 터질 게 터진 거죠. 1980년대 동유럽에서는 금지약물을 복용하지 않는 선수가 드물 정도였어요. 구소련에 갔을 때 한 기념관에 역도 메달리스트 명단이 적힌 동판을 봤는데 그 사람들 절반 이상이 약물 후유증으로 장애를 겪거나 고생하다 죽었어요.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도핑은 근절돼야 합니다.”

허 부회장은 어느 종목보다 도핑이 만연해 있는 역도부터 앞장서서 종목을 혁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오랫동안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은 도핑에 의존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누군가 다시 금지약물을 복용하지 않으면 넘기 힘든 기록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포츠는 기록이 중요한데 이래서는 요즘 선수들이 의욕을 갖고 운동을 하기 어렵다”며 “그렇다고 의심만 갖고 과거의 기록을 모두 없앨 수는 없어 운영의 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올림픽 역도는 남자의 경우 56kg급부터 105kg 이상급까지 8개 체급이 있는데 이 숫자를 조금씩 조정해 56kg급 기록은 과거의 참고자료로만 남기고 53kg급이나 58kg급을 만들어 새로운 세계기록이 나올 수 있게 하자는 것. 체급을 새로 정할 때 서양에 비해 체구가 작은 동양인들도 배려한다면 역도가 더 글로벌한 스포츠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체력은 국력’보다 ‘즐기는 문화’ 돼야

허 부회장이 참가했던 9차례의 올림픽 가운데 한국 선수단의 규모가 가장 작은 대회는 이번 리우 올림픽이다. 이번 대회에는 선수 204명이 출전했다. 개최국이었던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출전한 477명의 반도 안 된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210명)보다 적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50명) 이후 최소 규모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312명)부터 대회마다 선수 수가 줄고 있어요. 올림픽 본선 티켓을 딴 단체 구기종목이 갈수록 적어지고 있기 때문이죠. 애틀랜타 대회 때만 해도 야구, 남자 축구, 남녀 농구, 남녀 배구, 남녀 하키, 여자 핸드볼 등이 출전한 반면 이번에는 남자 축구, 여자 배구, 여자 하키, 여자 핸드볼만 나갔으니까요.”

1990년대 중반보다 경제 규모는 훨씬 커졌는데 올림픽 선수단 규모는 줄고 있으니 안타깝지 않으냐고 물었다. 대답은 의외였다.

“1980년대만 해도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비장했습니다. 나라가 못사니 올림픽 메달로 큰 위안을 삼았던 시대였죠. 하지만 이제 먹고살 만하게 됐는데도 ‘체력은 국력’이라고 생각하는 풍토가 남아 있어 안타깝습니다. 올림픽은 단순히 메달 숫자를 겨루는 이벤트가 아니에요.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축제입니다. 많은 선수들이 나가면 더 좋겠지만 그것보다는 올림픽을 즐기는 게 더 중요합니다.”

메달 경쟁은 별 의미가 없다는 얘기일까? 허 부회장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출전한 올림픽인데 참가하는 데만 의의를 둬서는 당연히 곤란하다”며 “올림픽 메달은 하늘이 점지한다는 말이 있듯이 당연히 최선을 다하는 자세는 중요하다. 단지 전쟁처럼 생각하기보다 더 즐겁게 운동하는 풍토와 이를 보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2020년 도쿄 올림픽까지 10회 연속 출전이라는 진기록을 세우고 싶지 않으냐”는 질문에 “건강이 허락한다면 좋겠지만 욕심을 낼 일은 아니다”라며 “그보다는 서울이 도쿄처럼 두 번째 올림픽을 개최했으면 한다. 운영이 모범적이었던 1988년과는 격이 다른 높은 수준의 우리 문화를 보여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남=이승건 기자 w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