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계 왜 ‘여인천하’인가
열대야를 피해 산책하려고 찾은 한 서울시내 여대 캠퍼스에서 에이전트 7(임희윤)의 귀가 번쩍 뜨였다. 학생들의 대화 사이로 7이 좋아하는 걸그룹 멤버들의 이름이 들려올 때마다 뜨끔, 뜨끔. 자신의 라이벌은 같은 아재 팬들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젊은 여성들까지 여성그룹 멤버들을 최애(‘가장 사랑한다’는 뜻의 인터넷 속어)하는 상황이라니 이것은 거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이다.
7은 새삼 요즘 가요차트를 들여다봤다. 블랙핑크, 여자친구, 원더걸스, 트와이스가 1∼5위에 꽉 들어찼다. 아이오아이, 태연, 씨스타, 언니쓰, 소녀시대…. ‘쇼미더머니 5’ 출신 음원 등 몇 개를 제외하면 걸그룹 판이다. 20위권 내에서 남성 아이돌 그룹의 향취를 조금도 느낄 수 없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최근 몇 달째 이어진 구도다. 지난달 30일 이화여대 농성 현장에서 일종의 투쟁가로 ‘임을 위한 행진곡’ ‘바위처럼’ 대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불린 것은 상징적이었다.
7은 먼저 아이돌 전문 비평 웹진 ‘아이돌로지’가 지난달 펴낸 꿀처럼 소중한 자료, ‘아이돌 연감 2015’부터 파고들었다. 지난해 데뷔한 아이돌 그룹은 60팀, 멤버는 총 324명. 이 가운데 걸그룹이 37팀, 187명으로 보이그룹을 압도했다. YG가 2NE1 데뷔 이후 무려 7년 만에 자사 첫 걸그룹 블랙핑크를 데뷔시킨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남성 아이돌이 일부 여성 팬덤에 여전히 기대는 반면, 여성 아이돌은 남녀노소 전반을 팬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보이그룹은 ‘잘생기고 춤 잘 춘다’에 여전히 집착하는 반면 여성그룹은 요즘 다채로운 이미지와 콘셉트, 음악 장르를 트렌드에 민감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여성이 여성에게 반하는 ‘걸 크러시’ 경향도 무시할 수 없겠죠. 여성들의 취향이 전반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여성그룹 f(x) 출신의 설리가 인스타그램에서 자유분방한 이미지로 화제를 모으듯, 남성 아이돌이 주지 못하는 ‘공감’ 키워드가 여성 팬들을 여성 스타 앞에 불러 모으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7은 조사 과정에서 40대 가정주부 김미화(가명) 씨를 만났다. “러블리즈 팬 사인회에 가게 해 달라고 조르는 초등학생 딸 정현(12)이 때문에 요즘 골치가 아파요. 우리 때 신화 좋아하는 건 그러려니 했는데, 우리 딸은 왜 ‘언니들’만 찾는 건지….”
작곡가들 사이에서도 웬만한 남성그룹보다는 될성부른 여성그룹에 곡을 줘야 뜬다는 말이 돌고 있다. 지금 가장 주목받고 있는 차세대 작곡가 그룹은 각각 트와이스, 여자친구의 곡으로 연속 히트를 기록한 블랙아이드필승, 이기용배다.
아이돌로지의 미묘 편집장을 만났다. “소녀시대, 원더걸스, 카라가 활약한 2007년 한 차례 걸그룹 붐이 있었습니다. 애프터스쿨, 티아라, 씨스타가 열풍을 이어갔었죠. 작년부터 다시 시작됐어요. 단, 요즘은 ‘걸그룹=큐트 or 섹시’ 공식이 무너졌습니다. 여성이 여성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가 지난해부터 조성됐거든요. 노랫말도 남자들이 보기 좋은 구애의 메시지보다는 좀 더 자아가 분명한 것들이 사랑받고 있어요. 여자친구, 태연의 가사나 뮤직비디오를 보세요. 같은 연애가 주제라도 사랑에 대한 주체적이고 구체적인 의지가 강조되죠. 남성 없이 혼자서 세상을 헤쳐 나간다는 메시지도요.”
7은 여자친구의 ‘너 그리고 나’를 재생했다. ‘나 언제나 그래왔듯 이룰 거니까/꿈에서 깨어나 나나나 나빌레라…모아둔 마음을 주겠어/그리고 나 마냥 기다리진 않을래’ 지금 열두 살인 정현이가 스물두 살이 되는 2026년, 투쟁의 현장에선 어떤 노래가 불릴까, 7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봤다. (다음 편에 계속)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