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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칼럼]김영란법의 보너스 ‘저녁이 있는 삶’

입력 | 2016-08-17 03:00:00

논란 많은 김영란법… 무리 없이 조기 정착하려면 현실적 고려 담아야
밤늦게 2차, 3차 가는 접대문화의 거품… 김영란법 시행 후 사라질 듯
업무 논의하며 식사하는 것은 잠재적 범죄 아니라
막힌 곳 뚫어 소통과 경제에 도움




황호택 논설주간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은 국회의원, 공무원, 공기업 임직원, 기자, 교사, 교수와 그 배우자 등 400만 명이 적용 대상이어서 파급 효과가 만만치 않다. 헌법재판소에서 합헌 판결이 나오긴 했지만 공인(公人)도 사람일진대 식사 메뉴의 선택권까지 침해하는 과도한 측면이 있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간첩 잡는 국가보안법에 있는 불고지죄(不告知罪)가 옮겨 와 김영란법에서는 배우자의 금품 수수 사실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으면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필자도 김영란법의 적용 대상자로서 “친지나 친구와 식사하고 선물 주고받는 것까지 규제받아야 하느냐”는 불만이 있다. 하지만 여론의 압력으로 국회를 통과해 헌재의 합헌 결정이 내려졌으니 현재 법제처에 가 있는 시행령이 공포되면 9월 28일부터는 싫든 좋든 이 법을 지키는 도리밖에 없다.

국회의원들도 주민의 민원을 전달하는 것만 ‘부정 청탁’에 걸리지 않을 뿐 3만 원(식사), 5만 원(선물), 10만 원(경조사비)의 3-5-10 상한선은 예외가 아니다. 의원은 금배지를 달지 않아도 얼굴이 명함이다. 의원이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면 식당 종업원도 누가 계산하는지를 지켜볼 것이고, 파파라치들도 N분의 1을 내는지 확인하려고 덤벼들 것이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농수축산업계의 우려가 크고 내수 경기에 미칠 악영향을 고려해 시행령을 수정해 달라고 대통령에게 건의했지만 정부가 기본적으로 입법 취지에 어긋나는 시행령을 만들 수는 없다. 김영란법의 여론 지지도가 70%를 넘으니 국회가 고치기는 부담스럽고 대통령이 총대를 메달라는 말처럼 들린다. 정말 농어민이 망하고 소비가 추락할 우려가 크다면 국회가 직접 고쳐야지 대통령에게 건의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국회가 모법(母法)을 고쳐 3-5-10 상한선을 올리기도 어렵다. 금액 규제는 정부가 물가를 감안해 시행령에 담아야 한다. 정부로서는 3-5-10을 완화해 충격파를 줄이는 방법밖에 없지만 서민 처지에서 보면 3-5-10도 많다.

한국의 접대문화는 세계적으로 유별나다. 글로벌 기업의 한국지사에서 칼퇴근을 하는 서구인들에게 “회사 끝나고 바로 집에 들어가서 뭐 하느냐”고 묻자 “너네 한국인들은 집에 안 들어가고 밤에 뭐 하고 돌아다니느냐”는 질문이 돌아오더란다. 서구인의 의식으로 볼 때 한국인들이 퇴근 후 폭탄주 몇십 잔씩 돌리고 2차, 3차 가는 관습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서울의 사대문 안이나 강남에서 3만 원으로 그럭저럭 점심은 때울 수 있지만 소주에 삼겹살을 구워 먹더라도 저녁을 맞추기는 어렵다. 그런 면에서 김영란법은 가족과 함께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울 인사동이나 통의동의 수수한 한옥 식당에 가면 2만5000원짜리 점심도 괜찮다. 반주를 곁들이고 싶으면 술을 선물용(5만 원 상한)으로 들고 가 나눠 마시면 될 것이다. 호텔에서의 호화 접대는 법카(법인카드)의 힘이다. 법카가 접대문화의 거품을 키운 주범이다. 김영란법의 시행과 함께 더치페이(각자 계산) 문화가 공직 분야부터 빠르게 확산될 수 있다. 유럽 국가의 의회 식당에서 기자와 의원이 만나 식사를 하고 각자 계산하는 모습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농축산어민의 소득 보전을 위해 추석과 설에만 선물 상한선을 올려주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 경조사비 10만 원에 대해서는 대체로 찬성하는 의견이 많다. 시간이 흐르면서 김영란법의 상한선 10만 원이 공사인(公私人)을 불문하고 경조금의 기준으로 자리 잡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업무로 연결된 사람들이 함께 식사하는 것을 꼭 잠재적 범죄로 볼 이유는 없다. 행동경제학에 따르면 식사를 하면서 만난 사람과는 심리적으로 더 가까워진다. 각계의 소통과 교류가 활성화해야 막힌 곳이 뚫리고 경제도 돌아간다. 이 법으로 일거에 혁명을 이뤄내려 하기보다는 시행령에서 법의 조기 정착을 위한 현실적인 고려를 담을 필요가 있다.

과거 손학규 전 의원이 ‘저녁이 있는 삶’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정시 퇴근과 노동시간 상한제 같은 공약을 제시했지만 노동 관련법만 손대서는 안 되고 근본적으로 사회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김영란법이 무리 없이 뿌리를 내린다면 우리의 접대문화와 저녁 풍경을 획기적으로 바꾸어놓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황호택 논설주간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