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난수 방송을 기다릴 탐사대원 동무들에게

입력 | 2016-08-18 03:00:00


김정일이 지켜보는 가운데 팔뚝에 돌을 올려놓고 망치로 깨부수는 훈련 시범을 보이는 북한 특수부대원. 동아일보DB

27호 탐사대원 동무.

주성하 기자

나는 당신이 남쪽에 있는지, 북쪽에 있는지, 아니면 방송 원고에만 존재하는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다만 평양방송이 격주로 금요일 오전 1시 15분에 내보내는 난수 방송을 통해 당신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저번 방송이 12일에 진행됐으니 다음 지시는 26일 금요일 오전에 또 나오겠네요.

여성 방송원이 “지금부터 27호 탐사대원들을 위한 복습 과제를 알려 드리겠다”며 “509페이지 68번, 742페이지 69번…”과 같은 식으로 다섯 자리 숫자를 읽는 것은 처음엔 남쪽 언론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언론도 곧 식상해질 겁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상관은 없습니다만, 지금도 대남 공작원을 양성하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이 문 닫았다는 소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후배들은 계속 훈련받고 있겠죠.

27호 동무는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모르겠지만 김현희, 김동식 등 임무를 수행하다가 체포된 당신의 선배들을 통해 북쪽의 공작원 훈련 내용을 전해 듣긴 했습니다. 공작원은 인민군 특수 병종의 4∼5배나 되는 훈련량을 소화해 철인이 된다면서요. 그런데 내가 남쪽에 와서 살아 보니 정말 시대착오적인 쓸데없는 훈련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글은 그래서 적는 것입니다. 내가 겪은 남쪽의 삶과 혹시 당신이 체험했을 경험을 두루 종합해 꼭 보고해 주길 바랍니다.

우선 육체적 능력은 거의 필요 없습니다. 공작원은 군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근육이 빵빵하고, 손에 굳은살까지 있으면 더 의심받기 쉽습니다. 공작원들이 제일 중시하는 게 산악 돌파 훈련이라면서요. “하룻밤에 40∼80km를 돌파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김정일의 ‘교시’에 따라 공작원들은 30kg의 모래 배낭을 메고 40km를 3시간 만에 가는 훈련을 한다면서요. 그 교시는 이미 유훈이 돼 누구도 감히 바꿀 엄두를 못 내고 지금도 그런 훈련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참 끔찍합니다. 그런 육체적 능력이면 차라리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제가 남쪽에 와 보니 여긴 산에 나무와 잡초가 빽빽하게 우거져 접근할 엄두조차 못 내겠습니다. 아무리 공작원이라도 산 몇 개 넘으면 탈진할 겁니다. 행군을 암만 잘해 봐야 멀리 도망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요즘엔 적외선 카메라가 설치돼 칠흑 같은 밤이라도 다 찾아냅니다. 공작원은 비트(은신처) 파는 훈련도 열심히 한다고 들었는데 그냥 땅을 깊숙이 파고 영원히 거기서 쉬는 게 안 잡히는 유일한 길 같습니다.

달리는 자동차 잡아 타기 훈련은 지금도 하나요. 여기 와 보면 알겠지만, 이젠 시골까지 포장도로가 다 돼 있어서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인 우사인 볼트도 차를 못 따라갑니다. 차는 또 어찌나 많은지 몰래 잡아 타려면 깊은 시골에서나 가능할 겁니다. 그런데 시골 가서 뭐 할 게 있겠습니까.

독도법(讀圖法)도 필수과목이라 하더군요.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도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목적지와 자기 위치를 다 아는 시대입니다.

현지화를 한다면서 서울말도 힘들게 배운다고 하던데, 그것도 필요 없습니다. 요새 남쪽은 세계화가 돼서 말투가 이상하다고 신고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제가 일하는 서울 광화문에도 중국인이 어찌나 많은지 차라리 중국인 행세를 하는 게 훨씬 안전합니다. 어쩌면 3만 명이나 되는 탈북자 흉내를 내는 게 더 쉬울지 모르겠네요. 서울말 가르칠 교관이 필요하다고 사람 납치해 가는 일도 할 필요 없습니다.

제일 웃기는 일은 단도 던지기를 배운단 소리였습니다. 중세시대도 아닌데, 참…. 요즘 남쪽은 폐쇄회로(CC)TV 카메라가 쫙 깔려 있어서 임무를 완수해도 도망갈 수 없을 겁니다. 총 암만 잘 쏘고 단도 잘 던져 봐야 어차피 범인 검거율이 세계 최고 수준인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어렵습니다. 그런 거나 할 거면 특수 훈련 자체가 무의미하군요.

제가 볼 때는 공작원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구글어스 돌리면 손금 보듯 볼 수 있는데 굳이 와서 정찰할 필요도 없고, 웬만한 정보는 다 신문에 실리는데 기자도 모를 진짜 비밀에 당신이 무슨 수로 접근합니까. 그러니 인터넷이나 도입해 공작원 보낼 시간에 검색을 열심히 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암살도 마찬가지입니다. 웬만하면 잡혀서 정체가 드러날 것이고, 그럼 미국이 기다렸다는 듯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할 텐데 그걸 감수할 가치가 있을까요.

그러니 27호 탐사대원 동무. 만약 남쪽에 왔다면, 그래도 견문이 넓어졌을 당신이 솔직히 말하세요. 쓸데없는 훈련은 왜 시키고, 쓸데없는 지시는 왜 내리느냐고요.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