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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의 프리킥]朴 대통령의 남 탓

입력 | 2016-08-19 03:00:00


허문명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을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며 소위 ‘헬 조선’ 같은 속어가 유행하는 풍조를 비판했다.

8·15 경축사에서 젊은이들을 훈계하는 것이 참으로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난 스포츠 감독은 선수 탓하고 못난 선생은 학생 탓, 못난 어른은 애들을 탓한다. 자고(自古)로 지혜로운 부모는 자식이 잘못하면 자신의 종아리를 때렸다.

청소년이나 젊은 세대가 말하는 ‘헬 조선’류의 대한민국 비하는 나도 마뜩지 않다. 하지만 이런 풍조가 나온 상당한 책임은 어른들에게 있다.

요즘 아이들은 과거보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더 각박해졌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공부, 공부’ 하는 것은 갈수록 심해지고 어렵게 들어간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이 안 된다. 결혼해도 집 장만은커녕 아이 낳아 기르기도 어렵다. 미래를 생각하면 한숨이 먼저 나온다. 일부 젊은이들의 비하와 냉소가 이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정보화 사회로 세상엔 비밀이 거의 없어졌다. 미디어에는 어른들의 못된 짓과 꼴불견들이 여과 없이 노출된다. 가진 자들의 갑질과 권력 있는 자들의 부정부패, 대통령 측근들의 막말, 패거리 문화에서 성 추문까지,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추악한 모습들을 바라보며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뭘 배울 것인가. 아마 그들도 욕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배워 가지 않을까. 그래선 안 된다.

어른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이들을 탓하기에 앞서 부끄럽고 미안할 뿐이다. 대통령도 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가장 큰 책임이 있다. 그러니 먼저 책임을 통감하고 젊은이들에게 미안해하는 말을 하는 것이 순서 아닐까. 그 다음에 훈계 대신 “문제는 많지만 그래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고 해야 하지 않을까.

대통령의 ‘남 탓’은 이번만이 아니다. 정치가 잘못되는 건 야당 탓이고 남북 관계가 안 풀리는 건 북한 탓이며 한일 관계가 경색된 것은 아베 총리 탓, 새누리당 단합이 안 되는 건 비박(비박근혜)들 탓, 온통 ‘남 탓’이다. 진정성 있는 반성과 성찰의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총선에서 국민들이 호되게 대통령과 집권 여당을 꾸짖고 쓰라린 패배를 안겨주어도 반성과 사과는커녕 이전의 방식대로 ‘마이 웨이’를 간다. 민심 앞에 이런 오만이 어디 있나.

권위주의형 리더들은 내외부의 적을 설정해놓고 그들 때문에 나라가 엉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고 나선 적과 싸워 이기려면 나를 믿고 따르라 열변을 토한다. 자신은 선(善)이고 적은 악(惡)이다.

‘남 탓’은 권위주의 리더십의 상투적 도구다. 박 대통령 리더십도 이 유형이다. 그래서인지 대통령의 말엔 감동과 공감이 없다. 메시지들도 모호한 개념으로 가득하다. 미사여구와 모호한 개념만 가득한 이런 정치를 정치학자들은 ‘레토릭(rhetoric)의 정치’라고 부른다. 내용이 없는 말뿐인 정치란 뜻이다.

레토릭 정치는 당연히 말과 행동이 다르다. 박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 시절 장관 인사를 ‘회전문 인사’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하지만 청와대 수석에 장관까지 한 사람을 또 장관을 시키는 것이야말로 회전문 인사의 금메달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례다.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다. 대통령은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