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창걸 한샘 명예회장(77)은 싱크대가 부엌 시설의 전부였던 1970년대, 부엌가구와 입식주방이라는 개념을 들여와 주부만의 노동 공간이던 부엌을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바꿨다. 그는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한국에서는 찾기 어렵다고 한 자수성가형 부자지만 실제 연봉은 등기이사 5명 가운데 가장 적다. 창업주라는 이유만으로 보수를 많이 받아야 한다는 낡은 사고가 이 70대 노(老)기업인에게는 없다.
▷조 회장이 어제 연구 재단법인 ‘여시재(與時齋·시대와 함께하는 집)’를 발족한 것은 그와 한국 사회에 새로운 도전이다. 기존 민간 연구소가 기업과 정부 입맛에 맞는 보고서만 양산하는 풍토에서 현실을 객관적으로 비판하는 싱크탱크를 만들겠다며 사재를 터는 것은 기행에 가깝다. 정부 눈 밖에 날 수 있는 모험을 하지 말라는 주변의 만류도 그를 막지 못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최근 브루킹스연구소가 기업에 초벌 보고서 내용을 미리 알려준 뒤 최종 보고서에 재계 의견을 반영했다고 폭로해 미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기업의 영향력을 높이는 데 이용되고 브랜드 캠페인의 도구가 된 연구소는 싱크탱크가 아니라 ‘이념 산업’의 부속품일 뿐이다. 브루킹스는 애초 결론을 정해둔 악의적 보도라고 반박하고 나섰지만 부끄러운 민낯을 감출 수는 없었다.
▷조 명예회장은 지난해 3월 연구재단인 ‘한샘 드뷰’에 보유 주식의 절반인 260만 주(4400억 원어치)를 순차적으로 내놓기로 하고 60만 주(1000억 원어치)를 먼저 기부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사장인 재단의 구조로는 기업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고 여시재에서는 이사직을 내놨다. 평소 공부 모임을 통해 알게 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이사장으로 선임해 모든 연구를 일임했다. 여시재 이사회는 김현종 전 유엔 대사, 안대희 전 대법관, 김도연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박병엽 전 팬택 부회장 등이 참여하는 드림팀이다. 재정적 독립을 이룬 여시재의 다음 숙제는 정치적으로도 제목소리를 내 한국을 대표하는 연구소로 성장하는 것이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