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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납량 영화-음악으로 한여름밤 나기

입력 | 2016-08-19 03:00:00

2016년 8월 18일 목요일 흐림. 폭설, 산장.#219 Ennio Moriccone‘L'Ultima Diligenza di Red Rock’(2015년)




영화 ‘헤이트풀8’ 사운드트랙 앨범 표지.

광복절과 말복이 지났음에도 열대야가 물러나지 않자 어젯밤 나는 안방에 설치된 ‘요금 도둑’, 그러니까 에어컨으로부터 머나먼 길을 도망쳐 이국의 눈 덮인 산장으로 향하기로 했다.

거실로 나가 리모컨을 마치 단검처럼 움켜쥔 뒤 TV를 튼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헤이트풀8’(국내 개봉 1월)을 재생했다. 영화가 시작되자 선풍기에서 불어오던 미적지근한 바람이 싸늘해졌다. 미국 와이오밍 주를 배경으로 폭설과 눈보라, 고립된 산장과 미심쩍은 현상금 사냥꾼, 현상수배범들이 드문드문 대사를 읊는 이 영화의 춥고 음산한 분위기 때문이다.

‘헤이트풀8’은 ‘미션’ ‘황야의 무법자’로 이름난 이탈리아의 영화음악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로 하여금 87세가 된 올해에야 아카데미 경쟁 부문 첫 트로피를 쥐게 해준 작품이다.

음악은 존 윌리엄스의 ‘죠스’와도 좀 닮았다. 바순을 필두로 한 관현악이 연주하는 불길한 저음 반복악절. 거기 들러붙어서 하이햇과 팀파니가 은근하게 조성해 가는 기분 나쁜 리듬감…. 첫 곡 ‘L‘Ultima Diligenza di Red Rock’(레드록으로 가는 마지막 승합마차)부터 모리코네는 ‘Gabriel’s Oboe’(‘미션’), ‘Ecstasy of Gold’(‘석양의 무법자’)와는 딴판인 자신 안의 지옥도를 보여준다. 호러, 스릴러, 미스터리의 요소가 뒤섞인 이 영화가 중반까지 설경과 대사 속에 다소 지루하게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막판 반전을 향한 추동력을 갖고 가는 것은 절반 이상이 음악 덕이다.

‘헤이트풀8’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사운드트랙을 묶으면 괜찮은 여름 선물세트가 된다. ‘레버넌트…’의 음악은 일본 거장 사카모토 류이치가 독일 전자음악가 알바 노토와 합작한 것. 작은 황 조각 하나만 스쳐도 불이 치솟을 듯 메마른 ‘헤이트풀8’의 긴장감은, 관현악이 이번엔 부유하는 전자음과 만나 습한 공간감을 뿜는 ‘레버넌트…’의 것과는 온도와 결에서 사뭇 다르다.

자, 여기 19세기 이국의 눈밭, 저열함과 가족애, 복수에 관한 이야기가 두 개 있다. 영화 속 ‘교수형 집행자’가 말한다. “당신 목을 매달 때 난 아무런 만족감도 못 느끼겠지. 나한테 이건 그냥 일이니까.” 난 영화와 음악 덕에 그날 밤 웃자란 여름의 심장에 얼음 비수를 꽂았다. 아무런 감정 없이. 아니, 전기요금에 대한 불안감 속에.

임희윤 기자 imi@donga.com